15일 오후2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 동성고 정문. 진료 번호표를 받기 위해 300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길게 줄을 선 채 자리를 지켰다. 의료 봉사단체인 사회복지법인 라파엘클리닉에서 무료 진료를 받기 위해서다. 진료실은 동성고 대강당 4층이지만 줄은 정문까지 100m넘게 이어졌다.
라파엘클리닉은 종합병원 병동을 방불케 했다. 100평이 넘는 공간 곳곳에 17개 과 진료실이 빼곡히 자리 잡았고 30여명의 전문의들과 100여명의 의료 봉사자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휴일마다 무료 진료를 해주고 임금체불 상담 등 인권보호에 앞장서온 라파엘클리닉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라파엘클리닉은 1997년 4월13일 서울대 의대 가톨릭 교수회와 학생회가 중심이 돼 만든 외국인 노동자 진료 및 구호센터다. 매주 일요일 오후 2시~6시30분 350여명의 외국인 환자를 치료한다.
10년 동안 혜택을 본 외국인 노동자는 9만여명에 달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약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외국인 노동자들과 신분이 노출될까 봐 병원에 가지 못하는 불법 체류자들에게 이곳은 '의료 성당'으로 불린다. 라파엘은 치유(治癒)의 천사를 뜻한다. 중국동포 고명금(58)씨는 "중국에서 가져 온 당뇨약이 떨어졌는데 치료와 함께 약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며 "의사 선생님들은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라파엘클리닉은 안규리 서울대 의대교수의 제안이 기폭제가 돼 탄생했다. 의료봉사 단체인 가톨릭 학생회 총무였던 안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열악한 의료 환경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료 진료센터를 열기로 결심했다. 김전 라파엘클리닉 소장(당시 서울대 의대 교수)과 고찬근 신부도 힘을 보탰다.
출발은 미약했다. 안 교수는 동료 교수와 학생들의 도움을 받고 자비 50만원을 털어 첫 진료를 시작했다. 고 신부의 주선으로 혜화동 성당 구내 백관동을 빌려 연 진료소는 환자들로 넘쳤다. 두 달 뒤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도움을 얻어 가톨릭대 성신교정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성신교정이 리모델링 되면서 1년 만에 다시 지금의 동성고로 옮기며 성장을 거듭했다. 고려대와 이화여대 등의 의대생들이 동참하고 사회각계의 후원이 이어지면서 청진기 몇 개로 시작한 라파엘클리닉은 10년 만에 종합병원 못 지 않은 조직을 갖추게 됐다.
사연과 곡절도 많았다. 김 소장은 IMF사태 당시를 또렷이 기억한다. IMF의 찬바람이 닥치자 갑자기 산부인과가 크게 붐볐다. 아이를 가졌지만 직장을 잃은 외국인 여성 노동자들이 대거 몰렸다. 김 소장은 "당시 라파엘클리닉은 출산 관련 의료기구가 없어 강남성모병원 산부인과에 부탁해 산모들을 구해냈다"고 말했다. 그는 성모병원은 물론 물밑에서 도와 준 이름 모를 의사들과 독지가들의 손길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보금자리였던 성신교정은 당시 금녀(禁女)의 땅이었다. 때문에 여자 의사들은 일요일 진료 때마다 사제들의 감시 속에서 진료소까지 가 긴장 속에 환자들을 치료했다. 치과 진료를 위해 동네 미장원 의자를 기증 받은 적도 있다.
김 소장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우리 국민이 누리는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는 동남아시아와 북한 등에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실제 라파엘클리닉 관계자들은 지난해 동남아를 방문, 현지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의료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을 절감한 후 국외 활동에도 나서기로 했다. 라파엘클리닉은 이미 라파엘 인터내셔널 태스크포스팀을 만들고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고 신부는 "라파엘클리닉의 활동을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이기심에 대한 참회의 봉사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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