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박정석의 아프리카 에세이] 말라위호(湖) 횡단기 <1>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박정석의 아프리카 에세이] 말라위호(湖) 횡단기 <1>

입력
2007.04.12 23:34
0 0

오래 전 물고기를 기르는 취미를 가진 남자를 한 명 알았다. 지갑도, 손목시계도, 운전면허도, 친구도 없는 남자였는데 열대어만은 매우 사랑해서 늘 곁에 두려고 했다. 조그만 집에 혼자 살면서 검푸른 물풀과 알록달록한 물고기들로 가득 찬 유리 어항을 네 개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어항은 그가 매일 밤 잠을 자는 구두상자처럼 비좁은 방의 너비와 거의 맞먹는, 다시 말하여, 남자의 키를 약간 넘을까 말까 하는 길이였다. 나머지 어항들은 첫 번째만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좁아 터진 집에 비해서는 여전히 컸다.

각각의 어항 속 세계는 나름대로 완벽한 소우주였고 그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그들과 그들 주인만이 알고 있는 질서에 의해 숨 쉬고 움직였다. 그는 화단을 가꾸는 것이 유일한 낙인 노인처럼 정성껏 어항을 돌봤다. 조그만 집안 구석구석을 팽이처럼 힘찬 관성으로 돌아다니며 물고기 밥을 주고, 물을 갈고, 이끼로 검푸르게 흐려지는 유리를 닦아내느라 매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이 많았다.

왜 열대어를 좋아하느냐고 묻자 남자는 한동안 생각한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조용하고, 우아하고, 헤엄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그도 그랬다. 성품이 조용하고, 팔다리의 몸놀림이 우아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내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해 생일을 맞은 나를 위해 그는 조그만 어항을 하나 선사했다. 꽤 멋졌다. 별세계처럼.

“그러지 마. 물고기들은 그러는 걸 제일 싫어해.”

내가 어항 유리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들기자 그는 이렇게 말했고 내가 동작을 멈추지 않자 결국 약간 화까지 냈다. 그의 성난 얼굴을 본 것은 그 전이나 그 후로나 다시 없었다.

시간이 흘러 네 개의 어항을 가진 남자가 사라져 버린 후에도 내 책상 위의 어항은 그대로 남았다. 아프리카의 말라위(Malawi)에 들릴 생각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말라위 국토의 2할을 차지하는 호수 속에 내가 찾는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우아하게 헤엄치는 화려한 색깔의 물고기들.

열대어에, 특히 ‘시클리드(Cichlid)’라고 불리는 콧구멍이 두 개(보통은 네 개이다) 뿐인 물고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라위라는 아프리카의 소국은 몰라도 말라위 호수(Lake Malawi)라는 지명은 들어봤을 것이다.

브라질의 아마존과 더불어 아쿠아리스트들에게는 성지(聖地)로 꼽히는 곳이 바로 이 곳 말라위 호수와 이웃나라 탄자니아의 탕가니카 호수다. 현란한 색채로 유명한 아프리칸 시클리드의 보고이자 현재까지도 계속 신종이 발견되고 있는 찬란한 믐부나(Mbunaㆍ관상어의 일종) 진화의 유적지이기도 했다.

길에서 만난 스웨덴 태생 집배원 울라와 함께 말라위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지만 다행히도 목적지인 케이프 맥클리어까지 가는 교통편이 있었다. 용달차보다 약간 더 큰 트럭인데 화물칸에 실린 각종 곡물과 짐들 뒤로 무려 삼 십 여명에 육박하는 승객을 태웠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트럭 뒤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프리카 달밤의 드라이브는 운치가 있었지만 가끔 가다 눈앞에서 큰 나뭇가지가 휙 나타나니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아프리카 대지에 굴러 떨어져 어디라도 부러지기 십상이다.

케이프 맥클리어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라 찰랑거리는 물소리만 들릴 뿐 컴컴하고 적막했다. 숙소 근처 술집들은 악어 가죽을 벗겨 만든 커다란 흔들 침대를 걸어놓고 어슴프레 촛불을 밝혀 분위기가 좋았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소음이 아니라 진공 상태와도 같은 고요함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해가 뜨기 전 호숫가로 나갔다.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는 아낙들이 아침식사를 위해 물을 긷고 그릇을 닦고 있었고 어부들은 녹이 슨 등잔불을 매단 낡은 배에서 밤새 낚은 물고기들을 내리는 중이었다. 동쪽으로부터 뿜어진 첫 햇살이 호수를 비추자 새파란 물은 흡사 거울처럼 태양의 금빛을 반사시켰다. 군청색으로 빛나는 호수는 낡은 배에 칠한 빨간색 페인트와 격렬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어부들은 그물에 낀 믐부나를 하나하나 떼어내어 깡통에 담았다. 일부러 식용으로 잡는 것은 아니고 그물에 걸리면 그냥 먹는 정도의 맛없는 물고기라고 했다.

그 비싼 믐부나의 시체를 깡통에 주워 담고 있다니. 다른 나라에서라면 고급 관상어로 어항에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을 물고기이지만 원산지인 이곳에서는 죽은 후 햇볕에 바짝 말려야만 그나마 가치가 있는 것이다. 동시대에서도 공간을 관통하며 만물의 의미는 변화하고 어떤 것은 사라지며 다른 것은 생겨난다. 이곳은 동아프리카의 말라위였다.

울라와 내가 식사를 위해 찾아간 장작구이 피자가게는 몹시 붐볐다. 폴란드인 두 명과 합석했는데 식당 웨이터로 일한다는 사람들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최악이야. 까다롭고 불평만 많고 팁은 잘 안주는 렐湛訣?”

“미국인은 촌스럽고 어벙하긴 해도 돈 씀씀이는 괜찮아. 늘 10%는 팁으로 놓고 가거든.”

“한국인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한국 기업들이 폴란드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폴란드 기업을 많이 인수했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 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달빛이 휘황한 말라위 호숫가에 앉아 울라가 가져온 위스키로 축배를 들었다. 검은 하늘에도, 같은 색의 호수에도, 손에 든 술잔 속에도 노란 달이 하나씩 떠 있었다. 술기운이 도는지, 적막한 호수의 분위기 때문인지 울라는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여전히 사랑하는데 그녀는 얼마 전 새로 남자를 사귀기 시작했다고 했다.

달빛과 호수, 알코올과 추억이 합쳐지니 결과는 오직 한가지였다. 스웨덴인은 슬프게 울기 시작했고 선수를 빼앗긴 나는 허무한 얼굴로 호수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술잔을 깨끗이 비웠으니 노란 달은 이제 두 개가 되었다.

하늘에 하나.

호수에 하나.

내일은 저 호수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 말라위

말라위는 아프리카 대륙 동남부에 위치한 내륙국가로 남한만한 면적에 호수가 국토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도 손꼽히는 극빈국이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사람 리빙스턴의 아프리카 탐험에 의해 유럽에 알려진 이래로 유럽의 식민지화, 저항, 독립의 역사를 밟아왔다. 말라위는 이웃 나라인 잠비아처럼 '콰차'라는 화폐단위를 쓰는데 이는 '닭'을 뜻한다. 말라위 여행에서 주의가 필요한 것은 빌하르쯔와 말라리아이다. 빌하르츠는 호수에서 수영을 할 때 감염되는 흡충병이다.

▲ 말라위 호수

말라위 동쪽 국경의 대부분은 국토의 약 1/5을 차지하고 있는 말라위 호수(Lake Malawi)다. 세계 11번째이자 아프리카 3번째로 커다란 호수. 400여종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으며 매년 열리는 낚시대회에는 전세계의 낚시꾼들이 모여든다.

케이프 맥클리어[말라위]= 글ㆍ사진 소설가 박정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