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 깊은 곳에서 목숨 걸고 싸운 명예를 회복시켜 주길 바랄 뿐….”
노병(老兵)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적진 침투와 요인 납치, 아군 구출, 도청 공작…. 첩보영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연길(81)씨에게 주어진 임무다. 무기래야 소총과 무전기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 극동사령부직할 특수첩보부대로 용맹을 떨친 KLO(Korea Liasion Officeㆍ주한 첩보연락처), 일명 ‘켈로부대’의 부대장이었다.
12일 만난 이씨는 한 눈에 보기에도 야위었다. 지난해 9월 폐암 진단을 받은 이후 갈수록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 하지만 반세기 전 전장(戰場)을 주름잡던 눈빛은 여전히 그 시절을 응시하고 있었다.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인 그는 광복 직후인 1945년 가을 첩보 업무와 처음 연을 맺었다. 성균관대 신입생으로 열 아홉 살이었던 그는 남북의 이념 투쟁이 극에 달했던 해방 공간에서 조국의 부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한국군 첩보부대의 효시인 국방부 제4국 소속으로 북에 파견돼 북측과 치열한 첩보전을 펼쳤다. 그러나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부대는 해체됐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이 그를 찾았다. 북의 군사 동향에 해박했던 그는 KLO 산하 고트(Goat) 부대를 이끌고 다시 3.8선을 넘었다. 평양의 대동강 하류에 위치한 초도라는 섬을 근거지로 북의 서해안을 교란하며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휴전이 되자 연합군사령부는 부대 해산을 명령했다. 계급과 군번이 없었으니 명예나 보상을 받을 길도 없었다.
어찌 보면 극비리에 특수 작전을 수행했던 그들의 존재 자체가 국가에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며 사투를 감내했던 부대원들은 조국 수호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자부심에 모두들 60년 넘게 이름 없이 살아왔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소박하다. 정부가 켈로부대의 실체를 인정하고 합당한 대우를 해주면 그만이다. 정부는 2004년 1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 북파 공작원이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켈로부대는 외국군 소속이라는 이유로 제외했다. 그는 “숨죽여 지낸 세월이 억울해서도, 돈 몇 푼 받자고 해서도 그러는 게 아니다.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정당하게 인정해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103명의 부대원 중 생존해 있는 동료는 19명에 불과하다. 세상을 등지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자신들의 존재마저 잊혀질까 두렵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낸 것도 그 때문이다.
이씨는 마침내 이날 아침 한 통의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인권위는 “외국군 소속 특수임무 수행자도 한국군과 다름없이 활동했기 때문에 국가가 보상 의무를 지닌다”며 해당 법률을 개정하거나 별도의 법률을 만들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이씨는 “국가를 위해 신명을 바친 사람들에게 정부가 먼저 나서 칭찬하지는 못할 망정 외면해서 되겠느냐”며 “이런 식이라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국민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이는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항변하는 노병의 눈가에는 먼저 간 전우들의 얼굴이 스쳐 지난 듯 눈물이 흘러 내렸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켈로부대를 아십니까.”
노병(老兵)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적진 침투, 요인 납치, 아군 구출, 도청 공작…. 첩보영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연길(80)씨에게 부여된 임무였다. 그는 미국 극동사령부직할 특수첩보부대로 용맹을 떨친 KLO(Korea Liasion Officeㆍ주한 첩보연락처), 일명 ‘켈로부대’의 부대장이었다.
12일 만난 이씨의 몸은 한 눈에 보기에도 야위어 있었다. 지난해 9월 폐암 진단을 받은 이후 갈수록 건강이 악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50여년 전 전장(戰場)을 주름잡던 눈빛은 여전히 그 시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광복 직후 첩보 업무와 처음 연을 맺었다. 당시 성균관대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지만 남북의 이념 투쟁이 극에 달했던 해방 공간에서 이씨는 조국의 부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한국군 첩보부대의 효시인 국방부 제 4국 소속으로 북에 파견돼 북측과 치열한 첩보전을 펼쳤다. 그러나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부대는 해체되고 그 역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미국이 그를 찾았다. 북의 군사 동향에 해박했던 그는 KLO 산하 고트(goat) 부대를 이끌고 다시 북으로 향했다. 대동강 하류에 위치한 초도라는 섬을 근거지로 북의 서해안을 교란하며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휴전이 이뤄지자 연합군사령부는 해산을 명령했다. 계급도 군번도 없었기에 아무런 명예나 보상도 없었다. 어찌보면 극비리에 특수 작전을 수행했던 그들의 존재 자체가 국가에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碁さ勇?사투를 감내했지만 조국 수호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자부심에 모두들 반 세기를 이름 없이 살아왔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소박하다. 정부가 켈로부대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는 것. 정부는 2004년 1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 북파공작원이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켈로부대는 외국군 소속이라는 이유로 보상대상에서 제외했다. “숨죽여 지낸 세월이 억울해 돈 몇 푼 받자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북파공작원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으로서 국가 안보라는 공동의 목표에 대한 기여를 정당하게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103명의 부대원 중 생존해 있는 동료는 19명. 해마다 줄어가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자신들의 존재마저 잊혀질까 두렵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낸 것도 그 때문이다.
이씨는 마침내 이날 아침 한 통의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인권위는 “외국군 소속 특수임무 수행자도 한국군과 다름없이 활동했기 때문에 국가가 보상 의무를 지닌다”며 해당 법률을 개정하거나 별도의 법률을 만들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이씨는 “국가를 위해 신명을 바친 사람들에게 정부가 먼저 나서 칭찬하지는 못할 망정 외면해서 되겠느냐” 며 “이런 식이라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국민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도 이는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항변하는 노병의 눈가에는 먼저 간 전우들의 얼굴이 스쳐 지난 듯 눈물이 흘러 내렸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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