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수 천명에 달하는 국군포로가 북한에서 소련으로 압송, 수용돼 강제노동에 동원됐으며, 정전협정 후 포로교환 때도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은 사실이 미 국방부 비밀해제 문서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미주한국일보 뉴욕지사가 11일 입수한 ‘한국전쟁 포로들의 소련 이동’이라는 보고서에서 확인됐다. 보고서는 냉전 종식 후 한국전쟁 미군 포로의 러시아 생존 여부 확인 및 유해 발굴ㆍ반환을 위해 미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설립한 ‘미러 합동 전쟁포로 및 실종자 위원회’의 조사 활동 결과 중 하나로, 1993년 8월26일 러시아 측 정부문서와 관계자 증언 등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보고서가 인용한 러시아측 속기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52년 9월19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외교부장과의 회담에서 ‘유엔군 포로의 20%를 인질로 잡아놓자’고 노골적으로 제안했다. 보고서는 이런 정황을 토대로 “압도적 다수의 국군이 포함된 상당수 유엔군 포로들이 (스탈린_저우언라이 회담 당시) 이미 소련에 분포돼 있는 수용소들에 비밀리에 옮겨진 것으로 본다”고 결론지었다.
보고서가 제시한 관련 근거는 강상호 전 북한 내무성 부상 겸 군총정치국장과, 53년 5월 이 문제를 심층보도한 미국 ‘에스콰이어(Esquire)’지의 자이그먼트 나고스키 기자의 진술이다.
퇴역 소련 장교 출신으로 북한 인민군에 파견돼 중장으로 승진, 인민군 보위국 보위 부국장을 지낸 강상호는 92년 11월 진술에서 “수 천명의 국군포로들을 소련 내 ‘타이가(Taiga)’ 지역 등의 300~400개 수용소로 이동하는 것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또 나고스키 기자는 소련 내무부(MVD·국가보안위원회(KGB) 전신) 요원 2명과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직원에게서 입수한 정보에 따라 국군포로의 소련 압송 경로와 현지 생활상을 진술했다.
진술에 따르면 압송은 두 경로를 통해 이뤄졌다. 하나는 51년 11월~52년 4월 태평양 해안과 ‘타타르 해협’이 얼어 있을 때 북한과 소련 국경인 포시에트(Pos’yet)’를 거쳐 기차로 지타(Chita)를 경유해 몰로토프(Molotovㆍ현재는 페름(Perm)으로 개명)로 옮겨졌다.
또 하나는 얼음이 녹았을 때 바다를 이용했는데, 보고서는 “주로 국군과 그 외 남한 정치인들로 구성된 포로들이 오호츠크(Okhotsk) 등 소련 극동 항구로 이동돼 그 곳에서 야쿠츠크(Yakutsk) 주변의 악명 높은 콜리마(Kolyma) 수용단지와 추크치해(Chukotsk Sea)의 반카렘(Vankarem) 등지로 보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어 “추크치해 지역으로 보내진 포로들은 최소 1만2,000명에 달했으며, 도로공사와 비행장 건설에 동원돼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고 적시해 현지 국군포로들의 규모와 그들이 수용소에서 겪은 고통을 짐작케 하고 있다.
이 사실을 증언한 강상호는 2000년 12월12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91세로 사망했다.
한국전쟁 전문가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원본을 면밀히 살펴야겠지만 탈북자 증언 수준에 그쳤던 국군포로의 소련 압송설이 미러 정부의 공동조사 보고서에서 확인된다는 점은 사료측면에서 뿐 아니라 포로 송환 문제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미주한국일보 뉴욕지사=신용일기자 yishin@koreatimes.com뉴욕=장인철특파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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