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과학을 전공자의 실험실 속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접근하기를 두려워했다. 과학자들은 대중을 향한 글쓰기를 하대했다. 과학자가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해야지, 가벼운 글을 쓰는 것은 외도라고 여겼다.
종종 외국의 과학 저술가들이 쓴 책들이 인기를 모으기도 했지만 일시적 현상에 그쳤고, 대중과 과학자들간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과학이 대중을 향해 손짓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바로 최재천(53) 이화여대 교수의 <개미제국의 발견> (사이언스북스)이다. 권위 있는 동물행동학자가 열대림에서 직접 관찰하고 연구한 개미의 세계를 인간 사회에 빗대 소개한 이 책은 1999년 처음 나온 이후 5만부가 팔렸고, 올해 초 22쇄를 찍었다. 그 뒤에 나온 수많은 과학책들이 이 책을 모범으로 삼았고, 한 부분이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개미제국의>
물론, <개미제국의 발견> 이 국내 최초의 교양 과학서는 아니다. 그러나 연구자가 자신이 직접 연구한 고도의 전문 분야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설명한 최초의 과학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개미제국의>
출판 당시 사이언스북스의 편집장이었던 이갑수 궁리 출판사 사장은 “첨단의 과학 분야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책으로, <개미제국의 발견> 이후 과학 출판의 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개미제국의>
이 책은 개미를 사회생물학적으로 접근한 첫 국내 저작물이기도 하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동물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은 큰 반향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였다. 의대에 낙방하고 어쩔 수 없이 동물학과를 선택한 최 교수였지만, 개미에 대한 관심 만큼은 그 이전부터 강했다.
고교 시절 읽은 솔제니친의 <모닥불과 개미> 라는 짤막한 에세이가 이상하리만치 잊혀지질 않았다고 한다. “개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하버드대 에드워드 윌슨 교수 밑에서 공부하면서 다시 한번 이 에세이를 읽었어요. 그 때부터 인생이 바뀌었죠.” 모닥불과>
솔제니친의 에세이가 그를 개미 가까이로 이끌었다면, <개미제국의 발견> 을 쓰게 한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 였다. 미시건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 귀국, 국내 강단에 선 최 교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늘 조용하던 강의실이 개미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시끌시끌해지는 것이었다. 개미> 개미제국의>
93년 국내에 소개돼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개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이 소설 속에만 한정된 것이 아쉬웠던 최 교수는 마침 <과학동아> 의 연재 제안에 개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재미있게 써보겠다고 답했다. “실화보다 재미있는 소설은 없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떠올리며. 이것이 <개미제국의 발견> 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개미제국의> 과학동아> 개미>
그는 책을 쓸 때 절대 ‘물타기’는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물론 과학이 마냥 복잡하고 어렵지 만은 않다는 것을 알려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을 빠트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최 교수는 “과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의 과학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학의 시대인 21세기에 과학을 모르고 살아 남겠다는 것은 언어 도단이죠. 모든 사람이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과학을 이해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과학 냄새만 풍기는 알맹이 빠진 책을 읽는 것은 과학적 사고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와 동료들이 연구한 것을 가감없이 그대로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문제는 전달 방법인데, 그것은 글 쓰는 사람의 재주와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죠.”
최 교수가 택한 것은 인간 사회에 대한 비유라는 방식이었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은 침팬지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유전자가 99% 일치하는 침팬지는 꿈도 꾸지 못하는 국가 건립, 노예제도, 분업제도 같은 일들이 개미 사회에서는 모두 일어나고 있어요.
진화 역사를 공유하지 않은 인간과 개미가 숙제에 대해 같은 답을 갖고 있는 것이죠.” 최 교수는 사람들이 과학책에 대해 가질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마치 인문서처럼 경제, 정치, 문화의 순으로 개미 사회를 풀어나갔다.
합작투자와 다국적 기업, 정치적 갈등과 합종연횡, 권력 투쟁, 전쟁과 노예…. 인간 사회와 놀랄 만큼 비슷한 개미들의 세계는 소설보다 신기하고 황홀했다. 여왕개미에 대한 일개미들의 ‘역적 모의’를 설명하기 위해 이방원과 정도전을 가져왔고, 식물로부터 단물과 서식지를 제공받는 대신 주변의 다른 식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디가드 산업의 창시자’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런 방식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문 분야를 일상 용어로 무리 없이 버무려낸 최 교수의 글 솜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교 없이 간결한 그의 글은 편안하면서도 흡인력이 있다. 신춘 문예를 준비할 정도로 문학에 심취했던 이력이 여기에 한 몫을 했다. “문학적 추억과 과학적 글쓰기가 섞여있다고 할까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시절 글쓰기를 지도했던 영문과 교수는 하버드대에 보내는 추천서에 ‘최재천의 글은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며 우아하다’고 써 주셨는데, 지금껏 이 말을 글쓰기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개미제국의 발견> 은 한국문학번역원의 외국어 번역 지원 도서로 선정돼 해외 출판을 앞두고 있다. 개미를 비롯한 곤충 뿐 아니라 까치와 영장류 연구, 각종 외부 활동으로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해 안타깝다면서도 올 들어 2권의 책을 잇달아 펴낸 최 교수는 “사이언스북스로부터 <개미제국의 발견> 의 개정판을 내자는 제안을 계속 받고 있는데, 기업 경영 차원을 좀 더 강조해 새로운 책을 쓸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개미제국의> 개미제국의>
■ 교양과학서 시장 매년 10~20% 성장
한국에서 교양 과학서의 역사는 해방 이후 전파과학사가 대중과학 시리즈를 번역해 소개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오랫동안 번역서에만 의존해왔고, 그 비중 역시 크지 않았다.
칼 세이건, 스티븐 호킹, 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저술가 층이 형성되지 않았고, 베스트셀러가 나오기 어려워 출판사도 부수적 영역으로만 인식해온 것. 내용도 계몽적 성격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인문학 대신 과학을 새로운 교양의 젖줄로 등장시켰고, 과학 내부에서도 연구만 할 것이 아니라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최재천 교수를 필두로 이인식, 정재승, 박경미, 김희준, 주일우씨 등 대중과 호흡하는 과학저술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1997년 사이언스북스가 과학 전문 출판사로 첫 삽을 뜬 이래 교양 과학서 출판에 주력하는 출판사도 10여 곳에 이를 만큼 늘어났다.
전체 출판 시장에서 보면 교양 과학서의 입지는 여전히 미미하다. 사이언스북스가 최근 실시한 시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문서와 교재를 제외한 교양 과학서의 연간 매출은 250억원 정도. 이는 전체 단행본 출판 시장의 2%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문, 사회과학 도서 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데 비해 과학서 시장이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매년 단행본 종수가 30% 가량 늘어나고 있고, 시장 규모도 10~20%씩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갑수 궁리 출판사 사장은 "오랫동안 존재했던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칸막이가 없어지고 있다. 과학 잡지를 통해 훈련받은 세대들의 요청에 맞는 책을 공급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좋은 필자 양성이 절실하다. 국민대 사회과학연구소 김동광 연구원은 "정부와 대형 출판사들이 저술 활동을 위한 제도적 지원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여전히 대중서 출간을 학문적 외도로 인식하는 교수 사회 문화도 바뀌어야 하고, 도서관 역시 양서를 많이 사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