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도 때가 있다. 상대가 개인이든 사회이든, 힘(氣)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 주먹이 안되면, 독기나 욕심이라도 있어야 한다. 김기덕(48) 감독에게 그 힘은 지칠 줄 모르는, 세상과의 어울리고픈 간절한 욕망이다.
감독으로서, 영화로서 김기덕이 가학과 자학을 번갈아가며 세상에 주먹질을 하고, 또 어느날은 “세상과 담을 쌓겠다”며 숨어버리는 것도 모두 채워지지 않은 그 욕망에서 비롯된 소외감 때문이다.
14번째 영화 <숨> (26일 개봉)을 내놓고도 그는 그 ‘나오기와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영화만 불쑥 던져놓고 숨으려 했다가는 생각을 바꿔 시사회장에 모습을 나타내 한편으로는 자신감 가득한, 다른 한편으로는 ‘지천명’을 앞둔 사람의 여유와 달관과 편안함을 보여주려 했다. 숨>
“아파서”라고 했다. “에너지도, 관심도, 욕심도 없어졌다”고 했다. “아파서 이메일도, 휴대폰도 끊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얼굴도, 몸도 많이 홀쭉해졌다. 줄줄이 이어진 해산(解産)으로 지쳐버린 산모처럼.
물론 그렇다고 그가 왕성한 영화 낳기를 중단하거나, 세상을 완전히 등질 리는 없다.
어느날 그는 불쑥 영화를 들고 나타날 것이다. 과거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주목을 받더라도 세상은 그에 대해 달라지지 않으며 그런 세상에 자신은 절대 어울릴 수 없다는 소외감과 절망감에 또다시 돌아서는 일이 있더라도. 그게 김기덕의 운명이다. “아직도 써 놓은 시놉시스가 10개는 더 있다. 모두 영화로 만들고 싶다.
누가 뭐래도”라는 그의 말은 그래서 솔직하다. <숨> 은 그가 “나에게 질문 하는 영화”라는 말처럼 이런 김기덕의 또 다른 말걸기이다. ‘나는 이렇게 바뀌었고, 이런 생각을 하고,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주고 싶고, 이런 것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숨>
김기덕은 웃음을 주고 싶다. <숨> 의 여주인공 연(지아)이 사형수 장진(장첸)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처럼, 여전히 김기덕식 서툼과 촌스러움은 지울 수 없지만 페이소스가 묻어있는 웃음을. 숨>
김기덕은 ‘말 안하고 살고’ 싶다. 자신의 목을 찔러 스스로 말을 잃어버린 장진처럼. “이미 <섬> <나쁜 남자> <빈집> 에서 보지 않았느냐. 침묵이 나를 서서히, 깊은 감정으로 이끌어 주는 것 같다. 말은 중복에 불과하다. 장첸이 우리말이 서툰 중국 배우여서가 아니다. 원래 ‘1년 더 살고 싶다’는 대사가 있었다. 빈집> 나쁜> 섬>
시나리오 초고를 여러 번 고치다 보면 말이 마음으로 스며들어 대사가 없어진다.” 물론 아직 그의 여백은 멋이 아니라, 서투름이고 부족함이다.
김기덕의 요즘 화두는 ‘시간’인 모양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부터 지난해 <시간> 까지. 그에게 시간은 인간과 인간관계의 변화와 성숙이다. 물리적 길이는 상관없다. 심리적, 감정적 시간이 중요하다. 1년 더 살고 싶다는 장진을 위해 연이가 면회 때마다 옷을 바꿔 입은 것으로 4계절을 보여주었듯이. “살아가는 속에 시간의 판타지가 없다면 심리적으로 갈 수 있는 세계가 없다. 그건 불행이다.” 시간> 봄>
김기덕은 “현실에서건 영화에서건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은 나하고 상관없는 일 같다”고 했다. 포기일까, 깨달음일까. <숨> 에서 장진의 증오의 들숨과 연의 사랑의 날숨에서 그는 날숨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디 사람이 날숨으로만 살수 있는가. 더구나 들숨으로 자신을 독스럽게 지켜온 김기덕이. 숨>
이대현기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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