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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5> 말라가 -새벽 어스름의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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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5> 말라가 -새벽 어스름의 지중해

입력
2007.04.10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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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거기 있었다. 바다는 새벽 어스름 속에 있었다. 지중해였다.

나는 다가가 처음엔 발을, 이내 손을 담가보았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과 노예들이,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사라센제국의 칼리프들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인들과 오스만투르크의 술탄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영국의 군인들이 바로 이 바다에 발과 손을 담갔을 터였다.

그들은 이 푸른 물을 차지하려 지지고 볶고 싸우고 죽이며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이 바다를 보기 위해 나는 1만 ㎞를 날아왔다. 나는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변) 한 가운데, 말라가 바닷가에 있었다.

그 말라가 바다에서, 나는 김사량(金史良)을 떠올렸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9월17일, 북측 종군 기자로 남해 바다에 다다른 소설가 김사량은 <우리들은 바다를 보았다> 라는 제목의 종군기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 도입부는 이렇다. “바다가 보인다. 거제도가 보인다. 바로 여기가 남해 바다이다.

진해만을 발 아래로 굽어보며 마산을 지척에 둔 남쪽 하늘 한 끝 푸른 바닷가의 서북산 7백 고지 위에 지금 나는 우리 군대 동무들과 함께 있다. 바윗돌을 파내고 솔가지를 덮은 은폐호 속이다.

저 멀리 서남쪽으로는 통영 반도의 산줄기가 굼실굼실 내다 보이고, 정면으로 활짝 트인 바다 한가운데로는 거제도가 보인다. 올숭달숭 물오리떼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그만 섬들은 안개 속을 가물거린다.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바다.”

문기(文氣) 그윽한 이 기사는 김사량의 마지막 종군기였다. 두 달 뒤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퇴각하던 그는 남한강 상류에서 실종됐다. 36세였다. 남해 바다를 향한 그의 (정당한) 그리움 앞에서 지중해를 향한 내 (허영에 찬) 그리움은 어쩔 수 없이 비속했다. “저 건너에 아프리카가 있겠군.” 혼잣말인 체하며 내가 한 마디 던졌다. “응, 모로코.” 철학자가 범위를 좁혀서 대꾸했다.

등장인물 셋을 독자에게 소개해야겠다. 한 사람은 여자 시인이고, 또 한 사람은 여자 변호사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남자 철학자다. 이들은 2004년 11월 중순부터 세 주 동안 나와 유럽엘 놀러 갔다 온 친구들이다. 내겐 그 여행이 가장 가까운 시점의 해외 나들이였다.

여정의 반은 이베리아반도에서 보냈고 나머지 반은 파리에서 보냈는데, 이베리아반도에서 우리 넷은 거의 붙어 지냈다. 나는 대여섯 번쯤 이베리아반도의 도시 이야기를 할 생각이므로, 아무래도 이 친구들이 불쑥불쑥 등장할 것 같다.

앞으로 당분간 ‘우리’란 나를 포함한 이 네 사람(시인, 철학자라는 고상한 직업을 지닌 남녀와 변호사, 기자라는 덜 고상한 직업을 지닌 남녀)을 가리킨다. 친구들에겐 이베리아반도가 처음이었고, 내겐 두 번째였다. 나는 1993년 봄, 유럽연합이 지원하는 저널리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베리아반도의 관광산업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 땐 내가 사진기자 노릇까지 겸한 단독 여행이었다.

11년을 사이에 둔 내 두 차례 이베리아 여행은 그 행로가 상당 부분 겹쳤다. 20세기 말에 그랬듯 21세기 초에도, 주로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얼씬거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여행 땐 스페인의 깊은 내륙에도 골고루 발길을 들여놓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았으나, 스페인을 처음 가보는 친구들에게 안달루시아를 건너뛰게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나는, 일종의 선량한 가이드 정신으로, 안달루시아 지방을 주로 살펴보자는 친구들의 의견을 따랐다.

우리가 2004년 초겨울 유럽에 가기로 한 것은 화가 친구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 였다. 그 친구는 근거지가 로마인데, 그 해 겨울 파리 유네스코회관에서 개인전을 하게 돼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허영을 우정의 자양분으로 삼아, 우정을 허영의 핑계로 삼아, 파리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어차피 유럽 나들이를 하게 됐는데 파리만 들르고 오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데 의견이 포개져,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에 가기로 했다.

스페인은, 그 곳이 구면인 나를 포함해, 우리 넷 모두가 깊은 환상을 지닌 나라였다. 특히 고전 문명과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 균형 있게 어우러진 안달루시아 지방이 그랬다. 하기야 어느 관광객이 스페인에, 안달루시아에 환상을 갖지 않으랴? 투우와 플라멩코와 파에야의 땅에.

영화나 산책도 그렇지만 특히 여행의 경우, 나는 혼자가 좋다. 영화관이나 산책로나 기차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지인들과 그런 놀이를 함께 도모하지는 않는 쪽이다.

아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놀이 자체에 집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행은, 그것이 하루 이틀에 끝날 놀이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싫은 부분을 드러내거나 발견하게 되기 십상이고, 그러다 보면 서로 티격태격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베리아반도를 함께 돌아다닌 친구들과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거의’ 없었다고 한 것은 티격태격이 아주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철학자 사이가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꼭 여행 중이어서 생긴 일은 아니다. 그와 나는 가까운 사이지만, 둘 다 성격이 모난 데가 있어서 서울에서도 더러 티격태격하곤 한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성격 문제만이 아니라 성적(性的)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여자 친구(‘걸 프렌드’라는 뜻이 아니라 ‘여자인 친구’라는 뜻이다)와 티격태격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들 가운데도 성격이 모난 이들이 있지만, 나는 그들과 티격태격하지 않는다.

여자와 티격태격해서 이로울 일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겨도 민망하고 져도 민망하니까. 여자와는 싸울 수 없다? 이것은 내 마음 속에 성 차별주의가 있다는 뜻이겠다.

그 성 차별주의 덕분이든 아니든, 그 여행 중에 시인과 변호사 그리고 나 사이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시인과 변호사 그리고 철학자 사이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철학자와 나 사이에만 한두 차례 티격태격이 있었다.

시인과 변호사 입장에서는 내가 원망스러웠을지 모른다. 우리들의 이베리아 여행에서 철학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던 데 비해, 나는 그저 얹혀 가는 역할(그런 것도 역할이라면)만을 맡았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우리들 가운데 유일하게 운전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의 운전 솜씨는 매우 훌륭했다.

한밤중에 도착한 말라가 공항에서 렌터카를 해 시작된 우리들의 이베리아 드라이브는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운전석에 매달린 철학자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그리 알차게 이뤄질 수 없었을 테다. 그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나도 그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그와 티격태격하면서도 뭔가 쫌 꿀렸던 것이 사실이다.

곧이곧대로 얘기하자면, 우리 넷 가운데 쓸모가 있는 사람은 둘 뿐이었다. 철학자는 뛰어난 운전 기량으로 우리를 실어 날랐고, 시인은 놀라운 눈썰미와 방향감각으로 고속도로에서 우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했다. 뒷자리의 변호사와 나는 경치에 취해 있든지 잠에 취해 있든지 술에 취해 있었다. 우리가 노닐던 땅이 세르반테스의 나라였던 만큼, 시인은 자신을 제외한 우리 셋을 17세기 초의 유명한 소설 캐릭터에 비유했다.

“이 차는 로시난테고, 철학자 넌 산초 판사야. 기자 넌 돈키호테고, 변호사 넌 둘시네아.” “그러면 너는?” 운전대 앞에서 고생 고생하는 것도 뭔가 좀 억울한데 하필이면 산초 판사에 비유된 철학자가 약이 올라 시인에게 물었다. “음......세르반테스지 뭐.” 시인의 나르시시즘에 철학자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들의 말라가 행은 우연히 이뤄졌다. 여행사를 통해 이리저리 싼 표를 구하고 있던 우리에게 여행사 직원은 기쁜 소식(복음!)을 전해 왔다.

파리를 거쳐가기만 한다면, 파리에서 스페인 아무 곳이나 가는 운임은 안 받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마드리드에서 내려 남행을 할까도 생각했으나, 공짜표라는 데 혹해 파리에서 가장 멀어 보이는 스페인 도시를 찾다 보니 말라가가 선택되었다. 더구나 거기엔 지중해가 있었다!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에 견줘, 특히 볼 거리 천지인 안달루시아의 다른 도시들에 견줘 말라가는 그리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가 자랑하는 알카사바(內城) 성채도 그라다나 알람브라 궁전의 알카사바에 견주면 변변찮아 보이고, 그 안의 궁전도 세비야의 알카사르 안에 자리잡은 돈페드로 궁전에 비하면 속 빈 강정 같다. 우리도 세비야 같은 이웃 도시를 오가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말라가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말라가의 거리들은 세비야나 그라나다에 견줘 한결 아늑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말라가에서 처음 지중해를 보았다. 서울에서 예약해놓은 호텔이 운 좋게 바로 해안가에 있었다. 나는 1990년대의 다섯 해를 프랑스에 살았는데도 그 때까지 지중해를 보지 못했다.

사실 그 시절엔 파리 바깥으로도 거의 나가보지 못했다. 생활이 쪼들렸던 탓이기도 했을 테고, ‘귀차니즘’에 깊이 중독됐던 탓이기도 했을 테다. 칸이나 니스나 모나코나 마르세유에서 온 친구들의 지중해 얘기를 나는 약간 부러운 마음으로 듣기만 했다.

93년 봄 안달루시아를 여행했을 땐 그 바다가 지척이었는데도, 일정이 맞지 않아 땅만 보고 다녔다. 그래서 말라가에 도착한 이튿날 이른 아침 나는 들뜬 마음으로 해변에 나갔다. 철학자가 옷을 주섬주섬 입고 따라 나섰다. 그 바닷가엔 철학자와 나 둘뿐이었다. 그 호젓한 지중해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말라가는 내게 축복이었다.

말라가 지방의 세 박자 민요나 무곡을 말라게냐라고 하는데, 말라게냐에는 ‘말라가 여자’라는 뜻도 있다. 우연히도, 며칠 뒤 말라가에서 지중해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는 우리 차에서 <말라게냐> 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누구 노래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은 눈의 말라게냐, 내 꿈 속의 말라게냐,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네, 오직 네 사랑 때문에”(Malaguena de ojos negros/ Malaguena de mis suenos/ Me estoy muriendeo de pena/ Por tu, solo tu querer)라는 시시껄렁한 가사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말라가에 뚱뚱한 여자들 많이 보이던데 말라깽이라니, 참.” 내 옆 자리의 변호사가 기지개를 켜며 썰렁한 유머를 농했다.

말라가가 피카소의 고향이라는 점을 깜박 잊을 뻔했다. 알헤시라스로 가기 위해 말라가 시내를 빠져나오다 차가 막혀 잠시 서있던 중, 변호사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어, 저게 피카소 생가인가 봐.” 정말 그랬다. 우리는 차를 잠시 세워놓고 지금은 기념관이 된 그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보잘것없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피카소를 보기 위해선 파리로 가야 한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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