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실업급여 수급자가 처음으로 60만 명을 돌파했다. 실업급여는 액수가 적어 “나라에서 주는 용돈 수준”이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한 푼이 절박한 서민에겐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의 기능을 하고 있다.
정부는 내년부터 자발적 장기 실업자에게도 실업급여를 지급할 방침이어서 수급자는 더 늘 전망이다. 노동부고용지원센터의 실업급여 창구를 찾아 실업자들의 한숨과 사연을 들어 봤다.
“처음엔 한창 일할 나이에 실업급여 창구를 기웃거리는 현실이 무척 부끄럽고 처량했죠. 그래도 어떡합니까, 먹고 살아야 하는데….”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남부종합고용지원센터의 실업급여 창구. 옆 사람의 눈길을 피해 무표정한 얼굴로 신문을 뒤적이거나 휴대폰 통화에 열중하는 30여명의 실업자 중에 말쑥한 정장 차림의 한 중년 남자가 눈에 띄었다. 2월부터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이경석(48ㆍ가명)씨는 대기업 부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12월 퇴직했다.
이씨는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속이 바싹바싹 탄다”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월 120만원의 실업급여는 아내와 대학 2년생 아들, 재수생 딸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마저도 5월까지만 받을 수 있다. 급여가 끊기면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
나이가 많아 재취업도 쉽지 않다. 행여 아빠 마음 다칠까 눈치만 보며 맘껏 웃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죄스럽고 미안하다. 20년 넘게 직장 생활로 모은 재산은 양천구 목동의 아파트 한 채가 전부다. 정부가 아파트 값 잡겠다고 보유세 폭탄을 터트린 곳이다. 그는 “지난해 보다 보유세가 3배는 늘었다. 집값 잡는 것도 좋지만 나 같은 실업자는 어쩌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실업급여 창구는 실업급여 신청을 받고 구직 상담도 하는 곳이다. 하루 종일 실업자들의 한숨으로 가득하다. 멋진 검정색 가방을 옆에 놓고 생활 정보지 구인란을 찬찬히 살피던 한 중년 신사는 “봄이라 기분 좀 내려고 큰 맘 먹고 가방도 샀는데 갈 만한 일자리는 한 곳도 없다”고 말했다. 누가 볼 세라 모자를 푹 눌러 쓴 한 남자는 취업이 여의치 않은 듯 “다른 데 알아 봐야죠 뭐”라며 실망 섞인 목소리로 휴대폰을 끊는다.
임신 6개월째라는 여자는 “회사가 ‘배불러서 어떻게 일 하겠냐’며 하도 눈치를 줘 권고사직으로 나왔다. 남편도 다니던 회사가 망해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마당에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걱정”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 곳에는 하루 약 350명의 실업자가 온다.
실업급여 창구의 분위기는 연령별로 사뭇 다르다. 당당하게 실업급여를 받는 20,30대와 달리, 50세 이상 고령자들은 취업 못하고 실업급여만 타가는 것에 대해 무척 미안한 표정이다.
계약이 만료돼 지난 달 직장을 잃은 한석원(32)씨는 “인터넷 등을 통해 내가 받을 수 있는 실업급여액과 기간을 계산한 뒤 왔다”며 “회사 다니면서 고용보험 꼬박꼬박 낸 만큼 실업급여 받는 건 당연한 권리”라고 말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이종기(55)씨는 “아무리 그래도 고개 빳빳이 들고는 못 받겠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러 사람들이 월급을 쪼개 낸 돈으로 혜택을 받는 걸 생각하면 고맙고 미안하다는 뜻이다. 김정식(53)씨는 “실업급여 타러 올 때마다 죄짓는 기분”이라고 했다.
40대 실업자들은 실업급여를 받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 한창 일할 나이에 실업급여를 받는 자신에 대한 원망과 함께 사회를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2월 권고사직으로 회사를 나온 윤경섭(46)씨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잘렸다. 나이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 구하기도 힘든 판에 중학생 아이 둘과 아내를 어떻게 건사할지 걱정이 태산”이라며 속을 끓였다.
최현정 상담원은 “‘40대 실업자들이 사회의 가장 큰 불만 세력’이라는 농담도 오가지만, 가정과 사회의 기둥인 40대가 능력과 상관없이 단지 나이 탓에 설 곳이 좁아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실업급여 창구에는 ‘단골 손님’도 많다. 실업급여를 받다가 취직한 뒤 다시 실업자가 돼 돌아오는 경우다. 기간제 교사 김경식(29)씨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실업급여를 타러 왔다.
지난해 3월부터 5월까지 실업급여를 받았던 그는 한 초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다 2월에 계약 만료됐다. 그는 “누구는 실업급여 두 번씩 타고 싶어서 타겠냐”며 “메뚜기처럼 한 철 학교에서 일하다가 계약 끝나면 또 실업자가 되는 게 기간제 교사의 슬픈 운명”이라며 씁쓸해 했다.
●실업급여
고용보험 적용 사업장에서 최소 180일 이상 근무하다 회사가 폐업 또는 도산하거나 경영상 해고, 계약기간 만료, 권고사직 등 비자발적 사유로 회사를 그만 둘 경우 받을 수 있다. 실직 전 3개월 평균 임금의 50%(월 최고 120만원)를 받게 되며 근속연수와 고용보험 납부실적 등에 따라 90~240일 차등 지급 받는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가짜 실업자' 눈덩이
실업급여 창구 상담원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실업자가 아닌데도 서류를 조작해 실업급여를 타 먹는 ‘가짜 실업자’ 추려내기다. 노동부는 지난해 고용보험 전산망 등을 통한 확인 작업을 거쳐 가짜 실업자 1만1,754명을 적발해 냈다. 2001년 4,443명에 비해 5년 새 3배 정도 늘어났다.
부정 수급액도 2001년 14억4,000만원에서 지난해 42억700만원으로 급증했다. 부정 수급자로 드러나면 최고 1년 이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지고 부정 수급액은 환수된다.
실업급여 창구에서 만난 실업자들은 부정 수급자들에 대한 적발과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온 이명우(36)씨는 “열심히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나라를 속여 실업급여를 받아간 사람은 눈물이 찔끔 나도록 더 호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짜 실업자 증가는 경기 불황과 무관치 않다. 부정 수급자 대부분은 일용직으로 재취업한 저소득층이다. 현행법상 실업급여를 받는 사람이 일용직에라도 취직할 경우 노동부에 신고해야 한다. 그러면 실업급여가 끊긴다. 그러나 언제 그만 둘지 모르는 ‘하루벌이’ 생활자들이 취업 신고를 하기란 쉽지 않다.
한 상담원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생계를 꾸려야 하는 딱한 사연을 외면하고 규정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며 “생계형 가짜 실업자들이 고용이 불안정한 일용직으로 재취업하면 일정 유예기간을 둔 뒤 실업급여를 중단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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