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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색깔있는 영화보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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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색깔있는 영화보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입력
2007.04.10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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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이 지구상에는 마츠코(나카타니 미키)란 여자가 있었다. 중학교 교사였지만, 뜨거운 물에 빨리 몸을 담그고 싶은 나머지 제자가 훔친 돈을 자신이 훔쳤다고 자백해 학교에서 쫓겨났고, 목욕탕 여급에다, 기둥서방을 살해했고, 긴자 거리의 최고 호스테스였으며, 다시 그 제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한국산 호스테스 멜로의 대표 주인공 영자가 울고 지나갈 만큼, 신산한 삶을 살았던 마츠코의 일생은, 그러나 흥겹고 행복하고 화사하고 늘 꽃이 만발한 분위기에 둘러 쌓여 있다.

부조리의 세계. 뮤지컬로 재 구성된 호스테스 멜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기한 점은 이 엉뚱방뚱한 영화가 차용한 잡탕의 영화 세상인데, 날개 없이 추락해가는 한 인간의 자화상을 여러 사람 회고조의 편린에 담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시민케인> 의 서술방식과 영락없이 닮아 있고, 한 시대의 역사와 개인사가 함께 진행된다는 점에서 <포레스트 검프> 와 정반대 지점으로 달린다. 물론 ‘디즈니의 공주, 호스티스 되다’도 이 영화의 또 다른 가능한 제목이다.

나카시마 데츠야 감독의 이 영화는 온갖 힘을 다해 관객이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흔히 말하는 거리두기가 철저히 지켜지는데, 관객들이 마츠코의 인생유전에 조금만 발을 들일라치면, 노래가 진행되고 웃음보가 터지는 상황이 연출된다.

애인이 기차에 자살한 후,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던 마츠코의 독백이 끝나고 나면 <해피 웬즈데이> 라는 노래와 함께 새로운 애인의 등장에 행복해 하는 마츠코가 튀어 나온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데도, 배경에는 꽃이 피고 새가 우니 더 할말이 없다. 만화같은, 뮤직 비디오 같은, CF같은, 화면의 속도감각에 절어 있다 보면, 이상하게 슬퍼진다, 마츠코의 일생이.

그랬다. 마츠코를 보는 일은 ‘슬펐다’. 줄거리가 독한 데, 워낙 연출이 오버를 하니까 마츠코의 일생에 거리두기가 되면서 오히려 그게 감정의 차단막을 형성한다.

그래서 온갖 유쾌한 방식의 정황에 마음이 가질 못한다. 특히 ‘다녀왔습니다’란 말. 마츠코는 언제나 불 꺼진 집에서 이 말을 되뇐다.(이는 <배트맨 2> 에서도 반복되어진 정황이었다. 불 꺼진 집에 돌아 온 캣 우먼(미셀 파이퍼)가 ‘여보 나 왔어요’ 라고 말 한 후, ‘참, 나 독신이었지’라고 되뇐다.) 여성들의 귀소본능과 애정욕구가 집약된 ‘다녀왔습니다.’

끝끝내 사랑 받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마츠코는 캣 우먼이 되어 멋진 복수극은 펼치지 못하고, 그저 천국으로 난 긴 계단에 서서 ‘다녀왔습니다’를 연발한다.

남자의 사랑에 울고 웃는 마츠코를 보자니 포스트모던 생기발랄 영화형식의 겉옷에 둘러 쌓인 사랑 이데올로기만큼은 다시한번 남성 중심적이라 느껴진다. 왜 21세기가 되어도 호스티스 멜로의 기이한 인생 역정은 끝나지 못할까? 왜 마츠코는 승승장구하는 포레스트 검프가 될 수 없을까? 호스티스 멜로의 끝에는 ‘여성의 팔자는 남성에게 달려 있다’는 여전한 구식 믿음이 존재한다.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여성상은 이제 그만. 혐오스런 마츠코의 영화형식은 사랑스럽지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다.

영화평론가ㆍ대구사이버대교수 심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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