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이 주로 사용해온 프레임(Frames: 액자, 얼개)과 렌즈라는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요즘 미디어비평이나 뉴스분석기사엔 이 말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사용된다. 두 가지 용어는 언론매체와 기자들이 전달하는 뉴스의 콘텐츠가 어떻게 결정되는 지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프레임은 어떤 문제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를 정의하고 뉴스 가치를 판단하는 구조다. 카메라맨의 구도설정이나 그림의 액자처럼 어떤 정보가 포함되고 어떤 정보를 무시해야 되는지를 결정한다.
요즘 정부 당국자들은 과거처럼 검열이나 경제적 압박 등 물리적 수단이 아니라, 프레임을 통해 여론을 왜곡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가령 한미 FTA에 대한 평가를 '국익론'이나 '협상의 득실' 프레임에 넣어 언론 취재 경쟁의 흐름을 유도한다.
그러면 기자들의 눈에는 '성장률 퍼센트'나 '개방 시기 년도' 따위만 보이고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보이지 않는다.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도, 당국자들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한 수시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뉴스를 보는 렌즈는 기자 개인의 의도나 경험, 성격과 더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기자의 경험과 관련한 미국의 에피소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외동딸 첼시의 입학 뉴스다. 클린턴 부부는 당선 직후 딸을 등록금 1만 달러가 넘는 워싱턴의 사립학교에 넣었다. 클린턴은 선거공약에서 공립학교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니까, 비판이 나올 만도 했지만 주류언론은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편집국장 밥 카이저, 부국장 밥 우드워드를 비롯한 많은 유명기자나 앵커의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뉴스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문의 사회면에서 연탄가스 중독 기사가 사라진 것은, 기자들이 더 이상 연탄을 때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뉴스를 보는 렌즈는 기자의 의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숫자가 줄어들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국익, 개혁, 민족, 민주화 등 주제만 나오면 흥분하는 기자들이 있다. 이들의 렌즈는 멀리 떨어져서 보는 망원렌즈다. 이른바 우리 경제가 중국과 일본에 끼어 위기를 맞을 것이란 '샌드위치론' 의 경우 인공위성 정도 높이에서 내려다 본 기사다.
반면 가까이 들이댄 현미경 렌즈는 전체 그림을 못 볼지언정, 미세한 먼지도 놓치지 않는다. 날카로운 칼로 잘라낸 단면도 역시 마찬가지다. FTA 비준을 앞둔 우리 언론에 이런 렌즈가 필요하다. 국민소득이 얼마나 늘어나는 가에 대한 복잡한 계산은 다른 곳에 맡기더라도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게 되는지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FTA가 양극화를 심화할까에 대한 논쟁이 치열해 혼란스럽다. 분명한 것은 또다시 우리 내부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패자들은 경기의 규칙이 바뀐 것도 모른 채 "왜 내가?"라고 의아해 하며 사회에서 탈락해 갈 것이다. 1990년대 말 IMF체제 때도 언론은 모아진 금붙이의 무게와 재벌 빅딜의 손익은 알아도 공원 노숙자의 사연을 조명하지 못했다.
피해부문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무엇인지, 피해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채 협상은 잘된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모순이다. 더욱 큰 모순은 내부의 희생을 토대로 국가발전을 이루겠다는 리더십이다. 이것이야말로 미국 등과 대조되는 한국형 권위주의의 잔재이며 개방을 통해 버려야 할 유산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예상 피해규모를 보고한 장관에게 "700명 뿐인가"라고 화를 냈다고 전해졌다. "700명이나 된다는 말인가"라고 화를 내야 하는 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다. 앞으로 경쟁에 탈락할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그들의 패배가 정당한 것인지 언론의 렌즈를 조금 더 낮은 쪽으로 가까이 대는 게 맞지 않을까.
유승우 기획취재팀장 sw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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