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사회로 가는 길’2부 릴레이 인터뷰는 서울대 박세일 교수로부터 시작했다. 그가 오래 전부터 선진화론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해왔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지금 진보는 위기를, 보수는 기회를 맞는 형국이지만 박 교수는 “철학적 보수가 없다”면서 “가짜 진보가 범람하듯 진정한 보수는 찾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현실에 안주하는 정치적 보수는 있지만, 보수의 가치를 성찰하고 왜 이를 지키는 게 나라에 도움이 되는지를 정리하고 거기에 자신을 던지려는 보수는 없다”고 쓴 소리를 했다.
_우선 노무현 정부의 4년을 평가하신다면.
“역사적 기여가 있었다고 보면, 산업화 민주화 과정에서 제대로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일거에 표출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방법이 잘못됐습니다. 자유주의 개혁을 했으면 좋았겠으나 너무 평등주의적 방향으로 풀려고 했어요.”
_자유주의적 개혁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지요.
“역사 발전은 개인의 창의와 자유에서 옵니다. 그것이 발전의 동인이지요. 개인이 뛰도록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주는 것이 자유주의적 개혁입니다.”
_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어떤 개혁을 의미하는지요.
“대내외 개방입니다. 대내 개방은 규제 완화고 대외 개방은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유스럽게 기업과 개인의 창의에 맡기자는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재벌의 횡포에 대한 우려가 있는데 그것은 산업화 시대의 얘기지요. 글로벌 시대, 세계화 시대에 개방을 하면 국내 독점력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_진보적 학자들은 1997년 IMF체제가 들어오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지적합니다. 자유주의적 개혁이 답안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인데요.
“거기서 진보적 학자들과 견해가 다릅니다. 나는 자유주의 개혁을 하지 않고 평등주의로 나가다가 경제 활력을 잃고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고 봅니다. 자유주의 개혁을 먼저 하고 보완적으로 평등주의 개혁을 뒤따르게 해야 합니다. 세계화를 추진한 나라 중 양극화를 겪지 않은 나라들도 많습니다.”
_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분배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이군요.
“기업이나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분배에 역행한다는 사고가 문제입니다. 우선 성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대신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선 공동체가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성장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성장이 되도록 저소득층에 대한 양질의 교육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_분업화된 세계 경제구조에서 기업 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늘리기가 쉽지 않다는 비관론도 있습니다.
“생각을 거꾸로 해봅시다. 세계 쪽에 서서 대한민국을 봅시다. 세계 무역의 3분의2를 다국적 기업이 하고 있고, 3분의1은 다국적 기업 내부의 무역입니다. 전 세계에 다국적 기업이 6만개 있습니다. 이들이 어디에 공장을 세우고 연구단지를 만들고 투자를 할지 생각해봅시다. 제일 먼저 인재가 있느냐를 보겠지요. 따라서 교육 경쟁력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어디가 주거환경이 좋고 행정서비스가 우수한가, 즉 도시 경쟁력이 중요합니다. 500대 다국적 기업 중 중국에 진출한 기업은 499개인데 한국에는 그 절반 수준인 250개에 불과합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내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_현 정부는 어떻습니까.
“거꾸로 가고 있지요. 교육도 3불(不)정책을 고집해서 양질의 고급 인력을 만들어내기 힘들지요. 우리의 도시경쟁력은 서울밖에 없습니다. 서울 집중 논란은 국내적 발상이고 서울을 키워 다른 쪽으로 넘치게 해야 합니다.”
_선진화된 한국은 어떤 모습인지요.
“경제적 의미의 선진국이라면 1인당 GDP가 2005년 가격으로 3만 달러 정도는 돼야 하지요.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다음 단계인 자유화를 이뤄야 합니다. 민주화는 국민이 투표를 통해서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고 그 정부가 국민의 재산과 생명, 권리와 자유를 하늘처럼 떠받들 때 자유화가 이루어집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치주의가 서야 하고 특히 사법부 독립, 언론 자유, 공무원 중립성이 확보돼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따뜻하고 품격있는 공동체적 연대와 신뢰가 재창조돼야 합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_실천 수단은 무엇입니까.
“국민교육과 시민사회의 자각이지요.”
_교육을 통한 선진화는 단기간에 이루어지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 시간을 단축시키는 통로가 정치와 언론이 아닌지요.
“맞습니다. 더 크게 보면 국가의 리더십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_훌륭한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말씀인지요.
“그렇지요. 훌륭한 대통령이 나와서 국가 비전과 목표를 제대로 제시하고 앞장서야 합니다.”
_훌륭한 대통령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 요건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 선공후사(先公後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이 국익과 공익을 버리고 개인적, 정파적 이익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각종 인기영합적 포퓰리즘 때문이지요. 두 번째가 국가 비전과 정책 능력입니다. 세 번째가 세계적 안목과 국제적 경륜입니다. 이런 덕목의 지도자가 진정성을 갖고 ‘이렇게 합시다’고 호소하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_그에 합당한 대통령 후보가 있는지요.
“국가비전과 국가정책과제에 대해 입장을 밝힌 분이 없어 아직 판단할 수 없습니다.”
_앞서 언급한 포퓰리즘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야당이나 언론에도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정치권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_한반도 선진화재단에서 대북 포용정책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상호주의, 국제공조, 보편적 가치, 국민합의를 주장했습니다.
“지난 9년간 우리는 8조원 이상을 북한에 지원했습니다. 남북대화를 200번 이상 했지요. 그러나 북한은 개혁개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북한은 핵개발로 갔습니다. 김정일 위원장과 대화를 안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원칙을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_7년 전 부시행정부가 들어섰을 때 클린턴 정부의 대북 노선을 따랐으면 북한의 개방이 더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부시 대통령 때문이 아닙니다. 북한의 개혁개방 의지가 문제이지요. 책임은 김 위원장에 있습니다. 한국 지도자라면 김 위원장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개혁개방을 해서 주민을 살리겠다면 돕겠다, 세금이라도 더 걷겠다, 그렇지 않으려면 물러나라고 말입니다.”
_6자 회담이 진척되고 한나라당도 대북정책의 기조를 바꾸고 있는데요.
“한나라당이 어떻게 바꿀지 모르겠지만 보도를 보니 강경에서 온건으로 간다고 합디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원칙은 강경해야 하고 원칙 아닌 부분에서는 유연해야 합니다. 북미 관계가 경직되면 강경하고 대화국면에 가면 유연해져야 한다는 식이라면 소가 웃을 일이지요.”
_상호주의를 썼을 경우 남북관계가 정지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대립과 냉각기가 북한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북한은 벼랑 끝에서 변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때 변할 것입니다. 10년 이상 (포용정책을) 해서 안됐으면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_한미 FTA 체결은 어떻게 보십니까.
“경제적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정치적, 안보적 이해관계도 달려있습니다. 장기적으로 한국이 새로운 동북아 전략, 세계전략을 짜나가는 데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결정입니다. 한국이 FTA의 허브가 돼야 합니다. 어느 나라나 FTA를 체결하면 이익과 손해가 엇갈리나 그 문제는 이익을 보는 쪽에서 손해 보는 쪽을 도와 구조조정을 잘 해나가면 됩니다. 다만 이번 한미FTA에서 교육 의료 법률 등 서비스분야가 미진한 것이 큰 흠입니다.”
●박세일 교수는
박세일 교수가 지난해 출간한'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은 보수의 교과서가 돼있다. 그 동안 말을 아꼈던 보수 인사들도 논쟁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선진화론을 거침없이 들고 나오는 데는 그의 선진화론이 한 몫 했다.
박 교수는 학자이면서도 실천가다. 1989년 친구인 서경석 목사와 함께 경실련을 탄생시켰고 93년에는 서울대 교수들과'세계화 연구회'를 만들었다. 94년 YS정부에 청와대 수석으로 참여했고 2004년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정치에 입문, 정책위의장을 맡기도 했으나 이듬해 한나라당의 행정중심 복합도시 합의에 반발, 의원직을 버리고 정치권을 떠났다.
지난해에는 한반도 선진화재단을 출범시켰고 얼마 전에는'선진화 스쿨, 청년 한선'도 만들어 차세대 지도자 육성에 나서고 있다. 또 다른 실험과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48 서울생
서울대 법대, 일본 동경대 대학원(경제학부), 미 코넬대 석사ㆍ박사
1985 서울대 법과대 교수
1995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사회복지수석
1998 미 브루킹스 연구소 초빙연구원
1999 KDI 석좌교수
2002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2004 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반도 선진화재단 이사장
저서 법 경제학, 대한민국 선진화전략
인터뷰=이영성 편집위원 leeys@hk.co.kr사진=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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