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부(63) 한일맨파워 대표는 값 비싼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다. 옷핀 슬리퍼 유리잔 등 생활에서 흔히 쓰는 잡화가 주요 판매 물품이다. 가격도 대략 1,000원 수준이라 차라리 ‘보따리상’이라는 표현이 적당할지도 모른다.
고객도 단 한 곳뿐이다. 하지만 20여년간 판매한 금액은 1조원이 훌쩍 넘는다. 1,000원짜리를 1조원 넘게 팔았으니, 그의 손을 거쳐간 상품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유일한 고객은 슈퍼마켓이 아니라 일본 100엔숍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다이소 그룹이다. 한일맨파워는 연간 매출액만 3조원에 달하는 이 그룹의 최대 물품 공급자다. 일본 100엔숍에서 사는 물건 중 열에 아홉은 한일맨파워가 공급한 상품일 가능성이 높다. 1,000원짜리 제품으로 일본 열도를 장악한 박정부 대표. 그는 여러 면에서 이 시대의 거상이다.
●마흔 다섯, 무역인으로 재탄생
그의 시작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불혹을 훌쩍 넘긴 마흔 다섯에 그는 인생의 기로에 섰다. 1984년 공장장으로 일하고 있던 회사에 위장 취업자들을 중심으로 노조가 결성되면서 ‘위기관리 능력에 없다’는 질책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사장의 지적을 견디지 못하고 15년간 몸 담아온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아무 대책도, 계획도 없는 결행이었다. “하루를 25시간처럼 살며 모든 열정을 다 쏟아 부었는데…다른 일을 할만한 열정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죠.”
일단 동생의 사업을 도왔다. 삼성 현대 LG(옛 금성) 등의 국내 기업의 일본 연수와 세미나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무역업체와는 맞지 않는 ‘한일맨파워’라는 기업명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자리가 잡히자 어렸을 적 무역상이 되겠다는 꿈이 몽실몽실 살아나기 시작했다. 종자돈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역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본업은 제쳐두고 인맥을 동원해 일본 업체를 닥치는 대로 찾아 다니며 납품을 의뢰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주류 도매업체가 고객 사은품으로 유리 재떨이 5,000개를 주문했다.
하지만 첫 주문을 받았다는 기쁨도 잠시, 담배 재의 열 때문에 유리가 깨지는 결함이 발견돼 전량 반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첫 실패는 쓰렸지만, 약이 됐다. 그 후 제조업체의 품질도 꼼꼼히 따져 보면서 수출 길도 점차 넓어졌다.
●100엔숍과의 운명적 만남
1989년 12월 그는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맞았다. 일본 100엔숍 업체인 다이소그룹 야노 회장과 독대가 이뤄진 것이다. 수십개의 상품을 싸 들고 야노 회장과 전무인 그의 부인 앞에 섰을 때에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꼼꼼하고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는 야노 회장의 입에서 마침내 ‘OK’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았다.
첫 거래 이후 주문이 쇄도했다. 일본경제가 장기 침체기로 접어들면서 저가 상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시기라는 점이 맞아 떨어졌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박리다매 전략으로 나갔다간 어렵게 잡은 고객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값싸고 질 좋은’ 상품 기획에 매달렸다.
현재 디자이너만 26명에 달할 정도로 상품 품질에 대한 박 사장의 집착은 대단하다. 일본 구매 고객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일본 상품기획자를 다수 고용해 일본문화에 맞게 상품을 개발하고, 상품 문구를 작성하고 있다.
1년이면 1,000여개나 넘는 제품을 개발하다 보니 판매한 상품만 5만개에 달한다. 보다 값싼 제품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동남아 유럽 러시아 등 전세계를 누비면서 제조업자와 ‘1원 깎기’ 싸움을 벌인다.
그가 제품을 의뢰하는 업체만도 26개국 1,800개에 달한다. 노력의 결실은 매출액으로 결실을 봤다. 90년 19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2003년 1,800억원으로 100배 가량 급증했다.
역경도 많았다. 95년 거래하던 한 업체가 부도가 나면서 3억원을 손해 봤다. 또 한일맨파워의 연수부문을 담당하던 직원들이 자료를 몽땅 들고 나가 회사를 차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최근에는 원ㆍ엔 환율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 제품 가격이 100엔 수준으로 고정돼 있어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박 대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2001년 다이소아성산업을 설립해 내수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현재 점포수가 360개에 매출액(2006년 기준)만 1,050억원으로 한일맨파워의 매출액을 추월할 정도다. 박 사장은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어려움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열정이 있다면 극복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점에도 해결책이 보입니다”고 말했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 한일맨파워 '노마진 사장님' 박정부 대표
‘노마진’ 사장님. 한일맨파워 박정부 대표와 인터뷰 도중 모 방송사의 개그 프로그램인 ‘노마진’이 생각났던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해 한일맨파워의 매출액은 1,300억원 가량.
하지만 순수익은 매출액의 1%도 안 된다. 회사의 존재가치가 이윤추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일맨파워는 빵점짜리 기업인 셈이다. 이익도 나지 않는 회사를 근 20년간 이끌어 온 박 대표의 속내는 무엇일까.
사실 박 대표는 회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윤추구로 보지 않는다. 질 좋은 상품을 값싼 가격으로 제공해 소비자들이 가격대비 최대의 효용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게 그의 유일한 목표다. 상품기획에 열을 올리는 것이나 싼 물건을 생산할 제조업자를 찾아 세계를 누비는 것이나 모두 이런 이유에서다.
그가 ‘노마진 사장님’이 된 또 다른 이유는 일의 성과보다는 일 자체를 즐기는 성격 덕이 크다. 공장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무역인으로 변신할 때도 가장 염려했던 게 일자리 걱정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할만한 열정이 남아 있느냐’는 문제였다. 열정만 있다면 생소한 분야라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박 대표는 “요새 젊은이들이 돈만 쫓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며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하다 보면 성공은 바로 자신 옆에 와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을 가장 싫어한다. 만약 그가 저가 전략으로만 고집했다면 중국의 저가공세에 밀려 사업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값싼 제품에도 질의 차별화는 분명히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26명의 사내 디자이너는 이런 그의 생각을 실천하는 첨병 역할을 한다. 그는 2001년 일본 다이소그룹과 합작으로 국내에 1,000원숍인 다이소아성산업을 설립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건 가격경쟁력을 위해 국내 제조업체와의 거래선을 끊어야 하는 시장 상황이다. 원화 강세로 국내 제조는 가격 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거래하는 국내 제조업체가 3년 사이에 60% 가량 줄었다. 박 대표는 “정글 같은 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서도 “이윤추구도 좋지만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구조가 정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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