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동문학의 걸작에 <꿈을 찍는 사진관> 이라는 강소천의 동화가 있다. 어릴 적 소꿉동무를 그리워하는 스무 살 청년의 추억을 사진으로 박아주던 그 꿈 같은 사진관이 우리 곁에 현실로 나타난 것일까. 꿈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 사진작가 부부 제리 율스만(73)과 메기 테일러(46)의 작품전은 ‘꿈을 찍는 사진관’ 을 떠올리게 한다. 전시장에 걸린 150여 점의 사진은 카메라가 찍을 수 없는 꿈, 상상, 환상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합성사진인데 방법은 서로 다르다. 제리 율스만은 암실에서 전통적인 인화방식으로 합성한 아날로그 사진을 고집하는 반면, 메기 테일러의 작품은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컴퓨터와 스캐너, 포토샵을 이용한 디지털 합성 사진이다.
두 사람의 개인전은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명성에 비해 소개가 한참 늦었다. 제리 율스만은 디지털 사진의 개념조차 없던 1960년대부터 완벽한 합성사진으로 초현실적 이미지를 만들어온 세계적 작가다. 디지털 시대에 굳이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이미지를 불러내는 암실의 연금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진작가 강운구는 “제리 율스만은 신기에 가까운 기술로 초현실적이고 명상적이며 신비하거나 기묘한 이미지들을 암실에서 창조해낸다”며 “아날로그 시대 최후의 거장”이라고 칭송한다. 그의 아내 메기 테일러 또한 디지털 합성사진으로 미국 전역에서 인정받고 있다. 두 사람은 대학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 27년 나이 차를 넘어 결혼했다.
흑백사진이 대부분인 제리 율스만의 작품은 고요하고 철학적이며 더러 그로테스크하다. 구름이 들어찬 방 안에 호수가 있고 숲이 있다. 호수 위 하늘에는 커다란 바위가 떠 있고, 어둠에 묻힌 나무의 몸통에 여인의 누드가 겹친다. 손바닥 안에, 푸른 하늘에 수면의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고여 있다. 실내의 벽에는 사람의 얼굴이, 마룻바닥에는 꿈꾸는 눈동자가 혹은 텅 빈 조각배가 있다. 중세의 석관 뚜껑에 조각된 죽은 이의 모습이 광장의 계단 아래 길게 누워 있고, 웅크린 채 엎드린 여인의 누드 위로 울창한 숲 속 물 웅덩이 한복판에 선 남자가 겹친다.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이 장면들 앞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꿈이, 끝 모를 상상이 어두운 심연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메기 테일러의 사진은 살짝 빛이 바랜 듯한 천연색의 아름다운 색감과 동화 같은 장면이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별이 빛나는 밤, 상어 떼가 헤엄치는 바다에서 해초로 장식한 옷을 입고 어깨에 황금 물고기를 걸친 채 수면 위로 떠오르는 여인은 황홀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보았을 것 같은 토끼는 땅 밑으로 내려가는 검은 구멍에서 목을 내밀고, 반짝이는 푸른 나비 날개를 단 작은 새는 달밤에 자전거를 탄다. 19세기 앨범에서 나온 듯한 사진 속 인물들은 우리를 과거로 데려간다. 구름, 우산, 빗방울, 나무, 그림자 등이 등장하는 사진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시키도 한다.
한미사진미술관은 올림픽공원의 평화의문 맞은편 한미약품 사옥 안에 있다. 도심에서 먼 탓인지, 이 근사한 전시에 관객이 적은 것이 안타깝다. 6월 9일까지. 월요일 쉼. (02)418-1315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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