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구례 사람들에겐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사상은 없었어. 운이 있고 없을 뿐이었지.”
8일 전남 구례읍 봉서리 봉성산 중턱 공동묘지. 묘비 하나 없이 허투루 만들어진 한 봉분 앞에 선 박찬근(72)씨는 말을 끝내 잊지 못했다. ‘동막골’처럼 평화롭던 마을이 하루 아침에 비극으로 치달은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마을의 비극은 시작됐다. ‘제주 4ㆍ3사건’ 진압 파병을 거부하며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군ㆍ경과 무력 충돌한 여순사건이 있는 지 한 달 뒤였다.
박씨의 아버지는 이날 아침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 임의동행 형식으로 끌려갔다. 경찰들은 말 한마디 없이 막무가내로 박씨의 아버지를 다그쳤다. 그날 저녁 삼중으로 철조망이 쳐진 구례경찰서에서는 수 십 발의 총성이 들렸고 이어 마을에는 부역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서에 쌓인 시신을 봉성산 중턱의 구덩이로 옮기는 일이었다.
저녁 무렵 70여 구의 시신이 지게에 실려 산으로 옮겨졌다. 경찰관들의 삼엄한 경계 탓에 죽은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박씨의 아버지도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박씨는 “아버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죄목도 없고, 아무런 조사도 없이 끌려간 사람들이 대다수였다”며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람을 데려다 이렇게 죽인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라고 눈물을 삼켰다. 행여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당시 토벌군들은 철조망을 쳐 놓고 당시 산을 찾아 올라가는 주민들의 접근을 막았다. 봉성산은 구례읍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었던 탓에 산 정상은 항상 군인들의 차지였다.
군인들이 철수한 이듬해 봄. 박씨와 마을 주민들은 산에 올라 매장지에 섰지만 발길을 되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엉킨 시신들이 썩을 대로 썩어 누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씨는 “당시에는 시신 썩는 냄새 때문에 나서서 구덩이를 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격렬하게 대립하는 바람에 그 곳은 ‘잊혀져야 할 곳’으로 인식됐고, 실제로 점차 잊혀졌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59년이 흐른 지금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9일부터 대전 산내,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청원 고은리 등과 함께 봉성산 사건을 조사하기로 했다. 1948년 사건 당시 사촌형을 잃었다는 임천(74)씨는 “국가가 이제서야 나선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유골을 찾아 제를 지낼 수 있게 된다면 위령탑이라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면민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던 구례군 간전면 간문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봉성산 아래 경찰서뿐 아니라 간전면에서도 군인들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간전면 주민 고재규(72)씨는 “토벌군들은 길가에 늘어선 초가집들에 불을 놓는가 하면 길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죄다 잡아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고씨는 또 “여기서 잡혀간 이들은 새끼줄에 묶여 문간초등학교 근처 논에서 확인 사살까지 당했다”고 전했다.
구례= 박경우기자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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