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언주 지음 / 민음사 발행ㆍ100쪽ㆍ7,000원
첫 시집을 내는 작가가 “나는 아이를 주렁주렁 낳고 싶어. / 서서 낳고 앉아서 낳고 걸어가며 낳고 뛰어가며 낳고 / 아이를 쑥쑥 낳아 보고 싶어.”라고 서문을 썼을 땐 언뜻, 제 안의 무진한 시상(詩想)을 흐벅지게 풀어내겠다는 다짐이 읽힌다. 속단하면 낭패다. 심언주 시의 화자는 출산은 원할지언정 정작 회임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다.
하늘이 비를, 화자 표현대로라면 “하늘이 씨를” 뿌리건만 그는 유리창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으깨진 채 수만 개 알들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심란하게 바라볼 뿐이다(<하느님의 아이를 배지 않겠다구요> ). 하느님의>
무슨 연유일까. ‘구름이라도 그려 넣자’라는 작품을 살펴보자. “의사가 복부에 감지기를 올려놓았다 / 태동이 멈춘 모니터 / …/ 내 / 아 / 이 / 가 / 떨어져 내린다”. 유산이다.
화자의 수태가 출산에 가닿지 못한 것이다. 좌절된 해산의 꿈은 곳곳에서 암시된다. ‘나’가 불러낸 새들은 “벽에, 창문에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깃털이 흩어진다. 날갯짓이 부서진다.”(<시뮬레이션> ) 국화가 지천인 화원에서 향 한 개비를 꽂자 “한숨 짧게 내쉬며 갓 태어난 향 연기가 사라진다.”( <국화 화원> ) 초조한 마음에 “여자 흉내를 모두 벗”고 맨몸뚱이로 엑스레이 앞에 섰지만 “아직 스피릿에 생명체 흔적이 감지되지 않”는다.( <비너스, 벗어던져요> ) 비너스,> 국화> 시뮬레이션>
하여 시인은 4월에게 미안하다. 봄은 무르익어 “개미허리 위 구둣발 / 아래 봄은 피는데 / 브래지어 곁 넥타이 / 사이 꽃은 피는데” 그는 새 생명의 성찬에 보탤 것이 없다. 괜스레 ‘4’를, 귀를 닮은 ‘3’과 면도날을 닮은 ‘1’로 나누고 “귀를 베는 면도날”을 떠올렸다가 더욱 4월에게 미안하다(<4월아, 미안하다>).
허나 어찌된 연유인가. 에로스 아닌 타나토스에 침잠할 법한 화자의 내면이 이토록 발랄하게 그려지다니. 작가는 “함께 걷던 ‘거리’가 있다 / 함께였는데 ‘거리’를 둔다”(<길을 길들이는 법> )고 쓰거나, ‘천남성’이란 독초(毒草) 이름에서 ‘첫 남성’을 떠올리는 등 천연덕스레 언어 유희를 즐긴다. 연결어미를 반복하며 리듬감이 살아있는 길쭉한 시구를 뽑아내기도 한다. 길을>
앞에서 인용한 ‘시뮬레이션’ 말미에서 “텅 빈 모니터에다 / 어리고 통통한 / 구름이나 몇 장 그려 넣자”며 읽는이를 헛웃음 짓게 하는 것은 또 어떤가. 김춘수 시인의 마지막 추천을 받고 2004년 등단한 이 늦깎이 작가(1962년생)의 시적 전략에 대해 이문재 시인은 “비극적 주제를 다루되, 그것을 짐짓 경쾌한 언어 감수성으로 감싸 안는다”라고 평한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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