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관 엮음 / 당대 발행ㆍ408쪽ㆍ1만5,000원
“한인들의 영어 공부열은 대단하다. 새 언어를 조금만 알아도 어떤 고관 지위에 올라가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다.”
1880년대 배재학당을 세운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말이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났지만 이 땅의 풍경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는가?
토익(TOEIC)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얻어야 졸업할 수 있는 대학교의 영어인증제, 원어민들이 가르치는 영어유치원 밤샘 등록 열풍…. <영어, 내 마음의 식민지> 는 영어 열풍이 강타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성찰한 논문들을 묶은 책이다. 영어,>
국제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우리나라에 ‘세계화’ 라는 화두가 던져진 1990년대 중반부터 10여년 간 발표된 14편의 논문들을 한데 모았다. 3명을 제외한 모든 저자들이 영문학 혹은 영어교육학을 전공한 교수들.
영어를 잘하는 능력이 특권인 현실에서 일종의 기득권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의사소통의 매개체에 불과한 영어가 슬그머니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에 분개한다. 논문들의 저자도, 논문들의 성격도 다양하지만 ‘영어에 주눅들지 말자’는 주제의식은 같다.
원어민이 아닌 경우 영어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해 심리적 곤경에 빠지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 그러나 우리는 좀 유별나다. 해방 이후 미국이 남한에 주도적으로 개입하고 미국 유학생 출신들이 지배세력으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영어는 우리 사회에서 신분상승을 꿈꾸는 일반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승격했다. 영어가 급속하게 권력이 되고 계급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하면서 한국인들은 ‘영어에 대한 억압’을 내면화했다는 것이다.
최샛별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는 영어의 계급재생산 의 기능에 주목한다. 대학생 1,719명을 상대로 한 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생활수준이 높은 학생중에는 42%가 영어에 자신이 있다고 답했지만, 생활 수준이 낮은 학생들은 12% 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해외에 거주한 경험 때문이건 독학으로 공부한 실력이건, 우리 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부모의 경제력과 상관이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송승철 한림대 영문과 교수는 한국에서 열리는 영어발표대회에서 한국인 교수들은 늘 들러리를 서고, 원어민들이 심사를 결정하는 관행에서 영어에 대한 깊은 콤플렉스를 발견한다.
우리의 내면과 정서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은 한국 사람인데도, 우리는 영어를 열심히 배우는 것과 원어민을 ‘상전’으로 모시는 것을 쉽게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회화 위주의 실용영어에 치우친 영어교육 방식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김진만 성공회대 명예교수는 일상회화나 실용영어는 중학교 2학년이면 가능한 만큼, 교양과 지식을 쌓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구보다는 그 도구에 담길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까지 타결된 요즘 무역도 자유롭게 하는데 이참에 아예 영어로 공용어를 삼자는 논리에 귀가 솔깃한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자기 언어 속에서 길러진 정체성에 대한 확신 가운데 비로소 진정한 교류가 시작되고 그것이 진정한 경쟁력’ 이라는 이 책의 결론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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