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 줄다리기협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던 한미FTA가 드디어 체결됐다. 한미FTA 찬성론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역사에 기록될 업적을 남겼다고 칭송하는데 여념이 없는 모양이다. 지난 4년간 사사건건 참여정부와 대립하던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노무현 리더십' 예찬에 앞장서자 청와대조차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은 한 편의 코미디다.
그만큼 이번 FTA 체결의 전체적인 득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협상 전문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현재로선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방송영역의 협상결과만을 놓고 볼 때 한미FTA가 체결된 2007년 4월2일은 대한민국이 문화주권을 상실한 날로 기억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번 협상의 결과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일반 PP(프로그램공급자)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간접투자는 100% 개방됐다. 유료방송 PP의 경우 한국영화와 애니메이션의 편성비율을 각각 20%와 30%로 낮추게 되었고, 1개 국가 수입쿼터제한은 현행 60%에서 80%로 완화되었다.
비준을 거쳐 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약 5년의 유예기간이 있다 해도,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미국의 대표적 미디어 기업들이 자회사를 세워 국내시장에 진출하게 되면 결국 국내 방송 콘텐츠 제작기반은 붕괴될 것이고, 미국에 대한 방송 콘텐츠 의존도는 가속화 할 것이다.
지금도 케이블TV는 미국 드라마와 리얼리티 프로그램, 각종 스포츠 및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들로 넘쳐 나는데 그 숫자가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은 자명하다.
수용자들의 취향이 다양화, 세분화 되면서 방송의 중심축이 지상파에서 케이블TV로 점차 옮아가는 추세를 고려하면 케이블시장을 전면 개방한 것과 마찬가지인 이번 협상결과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주고 받는 것이 협상의 기본임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방송시장의 경우, 다른 산업분야의 쟁점타결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을 뿐,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방송, 나아가 뉴미디어와 영화시장이 FTA 협상과정에서 이런 대우를 받아도 좋을 만큼 하찮은 분야란 말인가? 방송은 쇠고기나 오렌지, 자동차보다 덜 중요한 시장인가? 현대가 자동차를 수 천 대 수출하는 것보다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가 한 편의 블록버스터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과 창출하는 부가가치가 훨씬 크다고 떠들었던 것은 누구였던가? 90년대 말 이후 이어진 한류열풍과 한국영화의 중흥 속에서 "차세대 성장동력"으로서 문화산업과 CT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바로 정부 아니었던가?
방송은 단지 산업이 아니라 동시에 문화이며 우리의 문화정체성이 구축되고 발현되는 지점이다. 즉 방송이란 문화적 요소와 산업적 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문화적 요소는 보호하되 산업적 요소는 과감하게 경쟁의 무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방송시장 개방을 정당화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궤변에 불과할 따름이다.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나 대중영합적인 민족주의에 기대려는 것이 아니다.
이번 한미FTA협상에서 방송부문의 협상이 호혜적인 차원에서의 딜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려면, 우리 역시 미국방송 유통시장에서 최소한의 성과를 올려야 했다.
2005년에 KBS월드가 미국 위성TV인 에코스타에 진출해 500만명이 넘는 미국 시청자들을 확보한 사례가 시사하듯이 외국에서, 특히 미국에서 한국의 방송프로그램과 채널을 보기 힘든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방송 콘텐츠의 유통과 수용의 측면에서 일정수준의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거점들을 이번 협상을 통해 확보했어야 했다.
협상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방송시장의 개방은 없다던 정부의 약속을 순진하게 믿은 사람들은 사실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 언론은 일이 이 지경이 되지 않도록 무슨 역할을 했는지, 또 한국측 협상단은 문화영역의 협상에 관한 시민단체와 학자들의 우려를 귀담아 듣기나 했는지 깊이 성찰해볼 일이다.
안방 다 내주고 나서 몇 푼 안 되는 기금지원으로 콘텐츠산업을 살릴 수 있다고 보는지 방송위원회에도 묻고 싶다. 앞으로 방송위원회가 '문화산업'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얼마나 현실성 있는 제도적 차원의 대책을 내놓는지 지켜볼 것이다.
김영찬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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