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은 산이며 신화다. 후배 감독에게는 넘어야 할 거봉이며, 관객들에게는 거장이다. 거장의 칭호는 격려의 ‘약’도, 심리적 부담이라는 ‘독’도 준다.
칸영화제에서 평가 받고 한국에서 거장 반열에 오른 임권택은 이제 졸작을 만들 기회를 빼앗겼다. 그래서 그는 매 작품마다 전작보다 나은 생산의 강박에 시달렸을 것이다.
<천년학> (12일 개봉)은 제작과정의 어려움과 한 획을 긋는 작품에 대한 기대 속에 탄생했다. 이 영화는 가장 임권택적인 작품이다. 그의 상표를 붙일 수 있는 근거는 수백 장의 원고지로도 나열하기에 부족하다. 우선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주인공 동호가 송화를 찾아 나서는 서사의 골격은 임권택의 주특기다. 천년학>
그의 영화 절반은 주인공이 누군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길소뜸> <창> <짝코> …. 이런 서사는 아들은 고향을 버렸다는 내러티브에 기인한다. 임 감독의 청소년기 가출체험은 아들(임권택)이 가족(고향)을 찾아오는 반복된 영화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짝코> 창> 길소뜸>
<천년학> 에서 소리꾼의 삶은 구도의 길을 걷는 주인공과 일치한다. 영화로 세상의 꽃밭을 선물하고 싶은 임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구도의 길을 가는 스님과 예술가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 실패한 자가 떠도는 길은 유봉과 송화가 걷는 남도의 길로 표상된다. 이들이 가는 길은 ‘한국의 길’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의 인생행로를 요약해주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미학’으로 귀결된다. 천년학>
마지막으로 꼭 언급할 특징은 회상이다. 임권택의 많은 작품은 회상화면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천년학> 도 예외 없이 과거가 현재 이야기보다 웃돈다. 회상화면의 서사에 대해 정재형 동국대 교수는 “임권택의 영화는 시골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같은 구수함이 배어나온다”고 했다. 천년학>
<천년학> 은 임권택의 특징을 가장 압축한 영화이거나 동어반복한 복제품이다. 동호의 송화찾기는 <길소뜸> 에서 동진이 화영을 찾는 것과 겹친다. <서편제> 와 <천년학> 은 원작자(이청준)가 동일한 연작소설을 각색하여 내용 또한 닮음꼴이다. 주제의 반복은 예술적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천년학> 서편제> 길소뜸> 천년학>
임권택의 필모그라피를 통해 볼 때 이 영화는 예술에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학> 은 <서편제> 의 성실한 주석에 가깝다. 지나치게 성실한 서사적 설명으로 작품은 투명하거나 가벼워진다. 서편제> 천년학>
임권택 감독은 어눌하다. 이 어눌함은 행간의 존재로 인해 관객의 참여공간을 만든다. 어눌함이 다변으로 돌변할 때, 아니 설명의 강박을 드러낼 때 작품은 협소해지고 답답해진다.
<천년학> 에서 다변적 태도와 근친애의 금기에 대한 회피는 영화를 위축시켰다. 금기는 예술적 설득으로 깨뜨릴 때, 물위를 학이 나르듯 예술의 세계로 나아간다. 금기에 발이 묶인다면 생활의 억압에 소리를 버린 동호처럼 작품은 초라해진다. 천년학>
<천년학> 은 임권택의 영화 압축본이지만, 완결판이거나 결정판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거장신화의 강’에 빠져있는 임권택을 구해야 한다. 그가 자유롭게 영화판을 거니는 여유와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임권택의 압축본보다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결정판을 만나고 싶다. 천년학>
영화학 박사ㆍ영상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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