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로 가는 길, 산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산 저마다에는 영험이 깃들어 있는 법. 세계 최고의 봉우리들을 거느린 히말라야는 더욱 성(聖)스러운 곳이다. 신의 영역인 히말라야는 인간이 원한다고 쉽게 품을 열지 않는다.
2일 오전 네팔 카트만두에서 77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77KEEㆍKorea Everest Expedition) 대원들을 태우고 출발한 16인승 경비행기는 만년설을 뒤집어쓴 히말라야 연봉을 스치고 무사히 루크라(Lukla)에 도착했다.
16인승 경비행기라 짐의 일부를 다음 비행기편에 실었는데 뒷 비행기가 오지 않았다. 같은 날 함께 들어오기로 했던 박영석 원정대는 비행기를 타고 루크라 상공까지 진입했지만 산골짜기를 가득 덮은 구름과 안개 때문에 몇 바퀴 선회하다 다시 카트만두로 돌아갔다.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루크라에서 비행기 연착과 짐을 제 때 받지 못하는 것은 다반사라고 한다. 우기에는 날씨가 더욱 궂지만 요즘 같이 비교적 날씨가 순한 건기에도 오전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이 정오만 지나면 설산에서 내려온 구름과 안개로 기류가 불안해진다.
다행스럽게도 박영석 원정대와 나머지 짐은 3일 무사히 루크라에 도착했다. 원정대는 예정보다 하루 늦은 출발을 보충하기 위해 캐러밴의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산속의 마을 루크라는 매연 가득한 잿빛 이미지의 카트만두와는 딴판이다. 햇빛은 눈부셨고 공기는 더없이 청정했다. 급경사의 산비탈에 만들어진 공항 활주로는 15도 이상 경사가 졌다. 짧은 활주로에 착륙하는 비행기의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이륙할 때도 보다 짧은 거리에서 비행기를 띄우기 위해 고안된 경사진 공항이다.
해발 2,800m의 루크라에서는 공항의 비행기 말고는 바퀴라는 걸 찾아 볼 수 없다. 워낙 경사진 지역이라 이동 수단은 오직 '다리' 뿐이다. 대부분의 짐은 셰르파족인 포터들이 짊어지고 큰 짐은 해발 3,000m 이상에서 사는, 들소를 닮은 야크를 이용한다. 야크는 3,000m 이하에선 고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는다.
루크라에서 남체(Namcheㆍ3,400m)까지는 야크와 소의 교배종으로 3,000m이하에서도 힘을 쓰는 좁교와 야크가 번갈아 짐을 나른다. 일당 10달러 가량의 돈을 받고 30kg의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포터들의 모습은 놀라움 반 애처로움 반이다. 급경사의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야크나 좁교의 행렬도 경이롭다.
루크라를 출발해 트레킹 코스를 걷기 시작하니 스케일 큰 히말라야의 풍광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초록색 싱그러운 보리가 넘실대는 계단 논 너머로 '우유강'이라는 뜻의, 빙하가 녹아내린 강물 두드코시(Dudh Kosi)가 콸콸 흐른다. 강 건너편 머리 위에는 만년설을 뒤덮은 산들이 위용을 드러낸다.
한국에서 일상 보았던 풍경을 15인치 TV화면에 비유한다면 히말라야는 '아이맥스' 급이다. 짐을 나르던 포터에게 눈 앞 설산의 이름을 물으니 그건 산이 아니란다. 4,000~5,000m는 족히 돼 보이는 봉우리지만 그 정도는 산 축에 끼지도 못한다는 설명이다.
길 가 곳곳에서 셰르파족의 종교인 라마교의 탑과 경전을 새겨놓은 마니스톤, 마니차 등을 만난다.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어 둔 법륜으로 한번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를 돌리는 짙은 구릿빛 여인의 얼굴에는 세속의 시선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온화한 미소가 어려있다.
팍딩(Phakding)에서 캐러밴의 첫 날을 보낸 77원정대원은 30년 전의 추억으로 달뜬 채 밤을 지새웠다. 3일 오전 일찍 팍딩을 출발, 몬조를 지나 급경사의 비탈을 3시간 가량 올라 남체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하루 늦게 당도한 박영석 원정대를 만났다.
남체가 위치한 해발 3,400m는 '죽음의 병'이라는 고소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높이다. 고소병을 피하려면 체온을 빼앗길만한 행동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머리를 감지 않는 것은 물론 자거나 식사할 때도 항상 두툼한 모자를 쓰고 있어야 한다.
남체(네팔)=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남선우의 에베레스트를 말한다/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창조적 기록의 각축장
미국 등반가 리지웨이는 "에베레스트는 상징이요 비유며, 궁극의 목표"라고 했다. 그곳은 단순히 지구에서 제일 높다는 이유만으로 오르려는 게 아니라 산악인으로서 언젠가는 넘어야 될 지존의 용마루라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1953년 초등정된 이래 53년간 무려 3,026명이 그 꼭지점에 올랐다. 지난해 5월에는 한국인 19명을 포함 468명이 불과 보름 사이에 그 반 평의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한국은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배출한 91개국 중에서 네팔, 미국, 일본, 중국, 영국, 인도, 러시아, 스페인 다음으로 많은 76명을 기록, 세계 9위의 산악 강국을 과시하고 있다.
이런 에베레스트 등정의 이면에는 인간의 끝없는 한계 극복의 의지가 숨어 있다. 영국팀이 전인미답의 최고봉에 올라간 것이 1921년부터 9차례 도전 끝이었으니 32년이나 걸린 셈이다. 그들이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걸린 기간은 40여일. 이후 장비의 발달과 등반기술이 고도화하면서 매년 등반기간이 단축되었다.
1988년에는 프랑스의 마르크 바타르(37)가 22시간 30분을 기록하며 당일 등반 길을 열더니, 2004년 펨바 도르지 셀파(26)는 8시간 10분 만에 정상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에베레스트 등정사는 저산소에 대한 도전사이기도 하다. 인류가 히말라야에 처음 진출한 19세기 말, 산소분압이 평지의 30%도 안되는 8,000m의 고소에 인공산소 없이 노출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죽음의 지대라 일컫는 지구 꼭지점에 1978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33)가 '무산소' 등정을 이루기까지는 그로부터 80여년이 흘러야 했다.
에베레스트는 또한 창조적 등반의 시험장이기도 하다. 1980년 폴란드팀이 영하 40도의 혹한과 살인적인 강풍을 뚫고 최초로 겨울철 정상에 올랐고, 1988년 일본팀은 등정 장면을 일본 안방에 생중계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프랑스의 브와벵(37)은 정상에 오른 후 패러글라이딩으로 하산하는 모험을 단행했다. 1990년에는 호주의 가트니 스내프(34)가 '해발 0m에서 8,848m까지'를 성사시키기 위해 인도 벵갈만에서 무려 1,000Km를 걸어 정상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1996년 스웨덴의 고란 크롭(29)은 스톡홀름에서 자전거로 유럽을 횡단하여 장장 12,500km를 달린 끝에 등정에 성공한 후, 다시 자전거로 7개월 만에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2000년에는 슬로베니아의 다보 카르니카(38)가 정상에서 베이스캠프까지 3,510m를 스키로 내려오는데 성공했다. 2001년에는 미국의 시각장애인 바이헨 마이러(32)가 정상에 올라 타임지 표지기사를 장식했다. 같은 해 네팔의 고교생 탬파 트세리(16)가 최연소 등정 기록을 세웠으나 네팔 정부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듬해부터 16세 이하의 등반을 금지시켰다.
2006년 아파 셀파가 통산 16회 등정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고, 두 다리에 의족을 한 마크 잉글리스(47)가 정상에 올라 세상 사람들을 무색케 했다. 또한 같은 해 일본의 아라야마 다키오가 70세 7개월 13일의 나이로 정상에 올라 3년 전 유이치로 미우라가 세운 기록을 불과 3일 연장하며 최고령 등정자가 되었다.
도대체 에베레스트에서의 진기록 행렬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등반의 본질이 불확실성과 한계에의 도전에 있는 한, 에베레스트라는 화폭에 그려질 창조적 등반은 무궁할 수밖에 없다.
남선우 월간 마운틴 발행인(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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