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전통에서 필기구는 그저 글 쓰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생각을 맡길 수 있는 존재다. 그런 만큼 문인들의 필기구는 창작의 고통과 희열을 함께 하는 친구에 다름 아니다. 우리 시대 작가들은 어떤 지필묵을 벗삼고 있을까. 13일부터 한 달 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열리는 ‘지필묵의 문화사’ 전시회에서는 원로ㆍ중견 작가 20여 명의 ‘집필도구 선택의 변’을 비롯해 문인들의 필기구 200여 점 및 집필사진 100여 점이 공개된다.
김남조 시인은 사인펜 애호가다. 연필, 철펜, 만년필을 거치고서야 적합한 필기구를 찾았다는 김 시인은 “사인펜 열 두 자루 한 박스를 원고지 옆에 가지런히 두고 쓰는 일은 작은 행복”이라며 “속도는 빠르지 않아도 글씨가 쾌적하게 쓰여진다”는 선택의 변을 밝혔다. 지금은 컴퓨터를 사용하는 소설가 박완서씨는 가장 많은 작품을 쓴 70, 80년대의 충실한 동반자였던 파커 만년필을 추억한다. 시조시인 이영도 여사로부터 선물받은 이 펜을 실수로 망가뜨렸을 땐 “너무 상심한 나머지 앞으로 글을 못쓰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미신적인 생각까지 하게 됐다”고.
소설가 김훈씨는 “연필과 지우개가 없으면 한 자도 쓸 수가 없다”고 말한다. 지우고 다시 쓰기 때문이란다. 김씨는 “연필로 글씨를 쓸 때 작동하는 내 몸의 힘, 살아서 작동하는 육신의 확실성이 없이는 글을 쓰지 못한다”며 예의 ‘육필론’을 펼친다. 시조를 쓰는 이근배 시인은 붓을 고집한다. “글자를 익히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사랑방에서 먹냄새를 맡으며 자랐다”는 이 시인은 “컴퓨터가 나온 후로 박종화, 김동리 선생 등이 선뵀던 문사들의 독창적 필체를 보기 어렵게 됐다”는 아쉬움을 내비친다.
원고지를 창작의 텃밭으로 삼는 작가도 적지 않다. 원고지의 네모 칸은 소설가 박범신씨에겐 “무한한 상상력의 가열찬 통로”, 소설가 서영은씨에겐 “내 안에서 끌어낸 생각의 실로 수놓는 공간”이다.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은 “문인 중에 컴퓨터에 대한 거부 반응을 나타내는 이들이 뜻밖에 많았다”며 “장르별로 보면 시인 중 육필 예찬론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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