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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한 부분까지 판박이… 감정위도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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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한 부분까지 판박이… 감정위도 속았다

입력
2007.04.0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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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간판을 주로 그렸던 무명 화가 노모(64)씨는 지난해 10월 평소 알고 지내던 미술품 중간판매상 복모(51)씨에게서 귀가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위조해 한몫 잡아보자는 것이었다.

노씨는 1960년대 극장에 내걸리는 영화 간판을 그려 생계를 꾸렸으나, 이후 극장들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면서 알래스카나 캐나다 같은 이국의 풍경을 담아 해외로 수출하는 이른바 ‘수출 그림’을 그려온 전문가였다. 한 때 점당 10만원을 받을 정도로 ‘수출 그림’ 경기가 좋던 시절도 있었지만, 90년대 이후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이 일감을 싹쓸이하면서 수입은 급감했다. 생계가 어려웠던 노씨에게 위작 제안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는 점당 30만원을 받기로 하고 지난해 12월부터 경기 파주에 있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위조를 시작했다. 최근 국내 미술품 시장에서 각광 받고 있는 변시지, 이만익 등 원로 화가들을 범행 대상으로 택했다. 화가 사후에 가격이 치솟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중섭, 도상봉, 변종하, 남관 등 유명 화가들도 이들의 표적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할 분담도 철저했다. 영화 간판을 그려온 경력을 살려 위조 솜씨가 가장 빼어났던 노씨가 주로 인물화를 맡았고, 복씨가 끌어들인 박모(47)씨 등 4명은 경기 안산, 안양 등지의 작업장에서 전공 분야에 따라 정물화나 추상화 위조를 담당했다. 노씨는 전시회 팸플릿이나 도록 등에 담긴 그림을 실제 크기로 확대 복사한 뒤 그 위에 습자지를 대고 밑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수법을 썼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낡은 캔버스를 사용하고, 작가의 서명을 베껴 넣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노씨가 4개월 동안 그려낸 가짜 그림은 모두 43점. 거의 3, 4일에 한 번 꼴로 위작을 생산해낸 셈이다.노씨가 모사한 작품은 피해자들조차 “똑같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했다. 피해자인 서양화가 이만익 화백은 경찰에서 “잘 그렸다. 미대 정도는 나온 실력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복씨 일당은 직접 위조(90점) 외에도 천경자, 박수근 등의 위작 38점을 구입한 뒤 이 중 108점을 시중에 50만~150만원을 받고 되팔아 1억8,000만원을 챙겼다. 진품이었다면 1,00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상대적으로 시장의 검증 시스템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경찰이 이들에게서 압수한 변시지의 ‘조랑말과 소년’ 위작은 한국미술품감정위원회에서 진품 판정을 받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미술품 시장이 활황을 맞으면서 전문조직이 정교하게 위조한 위작들이 대량 유통되고 있다”며 “정상적인 유통경로를 거치지 않은 미술품이라면 일단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3일 국내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위조해 전국의 화랑 등에 유통시킨 혐의(서명 위조)로 복씨 등 2명을 구속하고, 노씨 등 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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