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채 들고 다녀야 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예요.”
부산에 사는 주부 윤순금(37)씨는 1년 전 갓 돌이 지난 딸이 아파 병원에 가려 집을 나섰다. 유모차를 잡은 윤씨 앞에 택시는 좀처럼 멈춰 서지 않았다. 급한 대로 버스에 올라타면서 윤씨의 고행(苦行)은 시작됐다.
자체 무게만 10㎏ 가까운 유모차를 번쩍 들고 버스의 높은 문턱을 오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딸을 좌석에 앉힌 윤씨는 손잡이 옆에 바짝 붙어 한 손으로는 아이를, 또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꼭 부여잡으며 안간힘을 썼다.
“버스 안에 유모차를 둘 마땅한 공간이 없었어요. 아이와 유모차, 양쪽에 신경 쓰느라 두 배로 힘들었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윤씨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버스에서 조심조심 내리고 나니 괜히 유모차를 갖고 나왔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윤씨는 허리가 좋지 않아 딸을 업고 다니는 게 만만치 않다. 그래서 유모차를 종종 이용하는 데, 지하철도 ‘거대한 장벽’이다. 수십m에 달하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할 때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유모차를 들고 수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힘이 다 빠져요. 숨도 차고 팔도 아프고….” 지하철 환승이라도 하면 그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백화점에서도 유모차는 ‘애물단지’다.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가 특히 그렇다. 유모차를 에스컬레이터 계단에 걸쳐 놓고 아슬아슬하게 오를 때면 떨어지지 않을까 마음 졸이게 된다.
엘리베이터는 편하긴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주변의 눈’ 때문이다. “유모차를 밀며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의 짜증 섞인 시선이 느껴지곤 해요. 사람도 많은 데 왜 유모차를 들고 나왔느냐 하는 거죠. 배려 문화가 부족한 게 아쉬워요.” 윤씨는 “도로가 울퉁불퉁할 때도 아이가 불편해 할까 봐 유모차를 들곤 하는데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나 다름없죠”라고 말했다.
딸 이름을 딴 ‘새봄공부방’ 원장인 그는 공정무역운동(개발도상국 생산제품에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자는 대안적 무역운동)의 일환으로 인터넷 숍 ‘우리가게’ 오픈을 준비 중이다. 윤씨는 2일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에 ‘유모차 이동권도 보장을’ 아이디어를 냈다. 장애인과 노약자, 임산부뿐만 아니라 유모차를 동반한 부모 역시 교통 약자임을 사회가 알아줬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k.co.kr
■ 한국일보·희망제작소가 알아봤습니다/ 유모차 끌고 지하철 한번 타려면 '녹초'
“도대체 얼마나 힘들길래…”
한국일보는 유모차로 시내를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직접 체험해 보기로 했다. 2일 오전 지하철 2호선 동대문운동장역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만만치 않다. 계단만 있을 뿐 평평한 경사로는 없다.
계단을 따라 빈 유모차를 끌고 내려갔다. 손잡이를 꽉 쥐었지만 덜컹덜컹 흔들린다. 지하철을 타려면 자그마치 7,8군데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빈 유모차도 이 정도인데 아이를 태운 유모차로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 부모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철 육교 지하도 어딜 가도…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유모차 진입금지’ 푯말이 붙어 있다. 발길을 돌려 한참을 헤매다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노인들로 꽉 찼다. 유모차를 끌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대입구역에서 내렸다. 에스컬레이터가 다른 역보다 훨씬 길다. 에스컬레이터는 이용할 수 없다고 했는데, 바로 옆 계단은 공사 중이다. 어디로 이동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유모차를 들고 역 밖으로 빠져 나왔다.
고궁 근처는 괜찮을까. 경복궁 부근 인도로 유모차를 끌고 갔다. 육교가 보인다. 경복궁에 가려면 건너야 하는 데 경사로는 없다. 한 손으론 아기를, 또 한 손으론 유모차를 들고 갈 판이다. 덕수궁 지하도도 부드러운 길은 없고 각진 계단뿐이다. 길을 건너려면 시청이나 광화문 쪽까지 가서 횡단보도를 이용해야 했다. 유모차 밀고 다니기는 고난의 연속이다. 유모차는 역시 짐만 될 뿐이었다.
●남들은 유모차 전용도로도 있는데
정부는 2005년 장애인 단체 등의 의견을 반영,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을 마련했다. 이를 근거로 영유아를 동반한 부모와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등 교통약자를 위해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대거 설치했다. 출입구가 낮고 경사진 저상버스도 도입됐다.
그러나 문턱은 여전히 높다. 네살배기 아이 엄마인 박지희(31)씨는 “지하철을 타고 싶어도 계단 생각만 하면 고개를 젖게 된다. 엘리베이터가 있다지만 찾는 시간이 더 걸린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우리와 달리 교통약자를 적극 배려한다. 호주 시드니는 유모차와 휠체어가 일반 행인과 함께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관광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다카야마(高山)는 아예 도시를 꾸밀 때 교통약자를 최우선 고려했다. 차도와 인도간 턱을 모두 없앴고 도로 옆 빗물 배수 철망은 휠체어나 유모차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1㎝ 이하로 촘촘하게 좁혔다. 공중 화장실도 장애인용이 편하게 이용하고, 갓난아이의 기저귀도 갈 수 있는 다목적 화장실로 뜯어고쳤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법령이 마련된 만큼 시행의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우선 지하철역이나 육교 지하도에 경사로 또는 경사진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희망제작소 정기연 연구연은 “육교와 지하도는 가능한 없애고 계단이 있는 건물에는 반드시 경사로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 빗물받이에 바퀴 빠질 일 없겠네
유모차와 휠체어가 이동하기 편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지난달부터 서울시내 빗물받이 덮개 창살 간격이 7~8㎝에서 3~4㎝로 좁아지기 시작한 것도 작은 불편을 놓치지 않은 한 시민의 제안이 행정기관의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다.
백공명(34ㆍ건축업)씨는 지난해 10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평화의 공원’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학생들이 빗물받이 덮개를 훌쩍 뛰어넘는 모습을 봤다. 백씨는 며칠 뒤 서울시립미술관 앞에서 유모차를 밀던 한 젊은 엄마가 빗물받이 덮개를 비켜가는 것도 봤다.
“인라인스케이트 바퀴나 유모차, 휠체어의 앞바퀴가 창살 사이로 빠지기 때문이구나.” 그는 즉시 서울시에 “창살 간격을 좁히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서울시는 백씨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빗물받이 덮개 5,229개를 2009년 말까지 모두 바꾼다. 불과 10억원의 예산으로 교통약자와 더불어 사는 사회가 좀더 앞당겨진 것이다.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