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타결로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구조적인 질서 재편과 맞닥뜨리게 됐다.
한미 FTA는 곧 미국과의 '경제적 동맹'을 의미한다. 경제동맹은 안보동맹과는 차원이 다르다.안보동맹이 파트너십이라면, 경제동맹은 시장의 단일화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원산지이자 세계 제1의 경제대국 미국과의 시장 단일화는 정부와 기업, 국민 개개인을 지배하던 기존 게임의 룰이 새 질서로 대체됨을 뜻한다.
새로운 룰의 요체는 바로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쌓든가, 아니면 도태하는'야성(野性)의 법칙이다. FTA가 몰고 올 후폭풍을 견디고 일어서면 한국은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영전하겠지만, 경쟁에서 뒤쳐지면 리그 자체에서 탈락하게 된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FTA가 기회가 될지, 위기가 될지는 전적으로 한국이 어떻게 준비하고 활용하냐에 달렸다.
한미 경제동맹으로 국가전략 새판 짜기
한미 FTA는 국가적 성장 전략의 새 판 짜기를 의미한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 동남아 국가를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큰 미국 시장을 제대로 활용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한미 FTA는 중국, 일본, 유럽연합(EU)보다 먼저 미국의 담장을 허물고 선수를 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정식 비준을 받게 되면 한국이 미국과 거래하는 상품의 80% 이상이 관세가 없어지거나 낮아진다. 그만큼 한국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진다. 미국 시장에서 중국의 저가 공세에 떠밀린 한국 기업들은 무관세를 무기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벌써일본 기업들이 미국과의 무관세 프리미엄을 이용하기 위해 한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미 FTA는 그러나 대외적인 수출 증대 효과보다는 대내적인 생산성 제고, 산업구조 고도화 효과에 더 역점을 둔 전략이다. 한국개발연구원 이시욱 연구위원은 "한미 FTA는 상품 개방을 넘어 인력과 제도와 기술, 나아가 의식의 개방을 의미한다"며 "한국의 성장잠재력 위기를 경제, 사회 전반의 생산성 향상으로 극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정책도구"라고 말했다.
중국의 가격과 기술 약진에 치이고, 일본의 품질에 밀려 옴짝달싹 못하는 '넛크래커(호두 까는 집게) 상황'을 생산성으로 돌파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미국은 발전했지만 중국은 열악한 지식 기반 서비스산업, 제조업의 서비스화를 위한 획기적 개선이 가능하고, 일본이 미국에 뒤지는 '시장 경쟁을 통한 생산성 극대화'의 질서를 한국경제에 심어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한미 FTA 미체결시 연평균 성장률을 5%로 가정한다면, FTA 체결시 생산성 증대 효과로 2018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5.78%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연구원 김도훈 연구위원은 "협상에서 몇 개를 얻고 잃었다는 것보다 경제 전반에 미치는 장기적 효과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 구석구석 구조조정 불가피
그러나 FTA 체결은 곧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서 진행될 구조조정의 신호탄이다. 단순히 자르고 내보내는 말초적 구조조정 수준이 아니다. 살아 남으면 지금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고, 경쟁에서 밀리면 아예 탈락하는 근원적 질서 재편의 구조조정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은 한미 FTA로 인해 농업 부문 피해가 1조~2조3,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연구원은 우리나라 공산품 가운데 584개 품목이 피해를 볼 것으로 분석했다. 서비스업 생산성은 미국이 한국의 2.2배에 달한다. 농업과 영세 중소기업 등이 구조조정의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같은 구조조정은 곧 국민 개개인들의 구조조정과 고통을 의미한다. 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피해가 불가피한 업종과 계층에 대한 지원이 앞으로 한미 FTA에 따른 사회갈등을 줄이고, 한미 FTA가 한국경제 재도약의 발판이 되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FTA로 인한 구조조정은 국민 개개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비즈니스와 직업이 새롭게 각광 받으면서 오히려 계층간 이동이 활발해질 수 있다"며 "단순히 양극화가 심화할 것이라는 피해 의식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구조가 고도화하고 서비스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그 틈새를 파고들어 새 비즈니스 기회를 잡는다면, 기존의 고착화한 직종별, 직업별 양극화 질서를 발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위기도 기회도, 하기에 달렸다
한미 FTA에 반대 입장인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폭과 깊이 모두 미국에 비해 열세인 서비스 산업이 FTA를 한다고 해서 신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 나아가 한국의 경제적 파이가 커진다 해도 기존의 대기업과 고소득층 등에만 이익이 집중돼 분배 격차가 더 심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한미 FTA가 한국경제에 구조적 이익을 가져올지, 아니면 손실의 구조화를 고착화시킬지는 결국 모든 경제 주체들이 하기에 달렸다는게 중론이다. 한미 FTA는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며,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 이시욱 연구위원은 "정부는 제도의 투명성을 높이고, 기업은 부가가치 고도화 전략을 도모하고, 국민 개개인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각 경제 주체들은 생산성을 높이는 만큼 성과를 보장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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