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장 자유롭고 진보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금문교의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최근 또 하나의 기록을 세웠다. 샌프란시스코 감리위원회는 지난달 27일 미국에서는 최초로 연간 매출액이 200만달러를 넘는 대형 슈퍼마켓이나 약국에서 비닐봉투(플라스틱백)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
비닐봉투에 물건을 담아주지 못하게 함으로써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의 양을 줄여보겠다는 친환경 조치를 내린 것이다. 최초라는 점에서 샌프란시스코로서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이 결정은 그러나 역으로 미국이 국제수준에 한참 뒤진 환경후진국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비닐봉투에 대한 규제의 도입을 주도한 샌프란시스코시 감리위원회의 로스 미르카리미의 설명 속에는 이 같은 미국의 후진적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미르카리미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대만 등의 경우를 예로 든 뒤 “많은 다른 나라와 도시들이 이미 비닐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며 “미국이 환경 상식에 속하는 일을 이처럼 늦게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의 다른 도시들도 서둘러 이 같은 조치를 취하게 되기를 희망한다”면서 “연방 정부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사실 미국의 슈퍼마켓만큼 비닐봉투 ‘인심’이 후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비닐봉투에 담을 수 있는 물건들도 여러 개에 나누는 것은 물론 두겹, 세겹으로 ‘안전하게’ 담아주는 경우도 흔하다.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한해 동안 대략 2억개의 비닐봉투가 쓰여지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한번 사용된 뒤 쓰레기 매립지로 보내지는 비닐봉투의 양은 연간 1,400톤에 이른다. 이 같은 양의 비닐봉투를 만드는데 해마다 45만 갤런의 석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비닐봉투를 사용하지 않으면 석유소비를 그만큼 줄일 수 있게 된다.
미국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을 전세계적으로 규제하려는 교토의정서 가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선 미국 정부가 환경보호를 우선시하기 보다는 온실가스 배출의 획일적 규제를 반대하는 미국 기업들의 기존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교토의정서 가입을 저지한 미국 기업들의 로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비닐봉투 사용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온 ‘캘리포니아 잡화상 연합회’의 로비와 기본적으로 속성이 동일하다.
잡화상 연합회의 반대 논리는 “비닐봉투 대신 재활용이 가능한 다른 종료의 백을 만들어 사용하면 비용이 더 든다”는 것과 “비닐봉투 대체품은 튼튼하지 못해 물건을 많이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로비에 호응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비용이 더 들어가면 그것이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반대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결국 미국에서 비닐봉투가 흥청망청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들의 로비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전역에서 비닐봉투가 사라지는 날은 한참 멀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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