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인 듯 정교한 이야기로 기존 가치를 비틀어존 바스 지음, 이운경 옮김/민음사 발행ㆍ1~3권ㆍ각권 1만원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뤄진 허무주의 3부작 말이다. 허무주의 희극, 허무주의(글쎄, 비극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파국이라고 할까) 그리고 허무주의… 뭐가 될까?” 사실적 블랙 유머라 했다가, 언젠가는 허무주의로 귀결될 3부작을 어떻게 규정할지, 작가는 서문에서 고심한다. 그러더니, “아마도 희가극이 될 것”이라며 슬쩍 눙친다. 미국 작가 존 바스의 포스트모던 소설 <연초 도매상(the soft - weed factor)> 이 번역됐다. 연초>
여느 장편소설의 너댓 배 분량은 족히 될 이 작품은 헐리우드식으로 말하자면, 코믹 사극 액션 블록버스터를 닮았다. 역사적ㆍ인문지리적 사실 등 바스의 엄청난 박물학적 지식이 오지랖 넓게 펼쳐질 때면 독자들은 유려한 변사 앞에 옹기종기 앉은 무성영화 구경꾼이 된다. 작가의 곁가지 치기, 비틀기, 입심은 비판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등장인물도 만만찮다. 신세계에 모여든 그들은 예를 들어 “일부는 이미 런던에서 창녀 노릇을 하던 여자들이었고, 또 일부는 가난이나 다른 상황으로 인해서 돈이 절박해진 여자들, 또 일부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저 아메리카에 가고자 하는 젊은 하녀들”이다. 식민지에 하녀로 4년 간 묶여 사는 것보다 6개월 동안 창녀 노릇을 하는 것에 더 마음이 끌려 있다.
각 장(章)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간단한 제목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처럼 긴 문장이다. ‘제분업자의 아내가 두 번 기절하다. 한 번은 시인이 아니라 제분업자에 의해서. 시인이 인생을 부끄럼 모르는 극작가에 비유하다’ (3권의 14번째 이야기).
시사주간지 <타임> 추천 100선에 뽑힌, 엉망인 듯 정교한 이 이야기는 옮긴이가 숙명여대 박인환 교수의 관련 논문을 참고하며 1년 여의 공을 들인 작품이다. 타임>
“굉장히 ‘미국적’인 작품이에요. 순결과 순수의 가치를 비틀고 위선을 풍자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가장 큰 사건을 뽑으라면 백인을 몰아내려는 인디언의 봉기인 셈인데, 나중에 어설프게 봉합되고 마니 결국 미국을 지배한 백인의 힘을 인정하는 거죠.”
1960년 이 작품을 발표한 작가 존 바스는 포스트모던 소설의 상징이다. 그의 글쓰기는 보편적 진리라고 여겨져 온 가치들을 부정, 소설을 ‘문학적 게임’ 또는 ‘어휘 퍼즐’로까지 몰고 갔다. 작가의 육성 녹음을 서술 기법의 일부로 제시한 <도깨비집에서 길을 잃고> (1968), 70년대 작품인 <천일야화> 와 희랍 신화를 재해석한 <키메라> 를 통해 스타 작가로 부상한 그는 새 소설 양식의 선구자로 각광 받았다. 키메라> 천일야화> 도깨비집에서>
놀라운 입심의 이야기꾼이 불과 30대에 썼다는 사실, 텍스트를 주무르는 입심, 역사의 행간 읽기 등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노골적인 성적 은유조차도 즐겁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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