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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아프리카 에세이] 가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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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아프리카 에세이] 가나 <3>

입력
2007.03.2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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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는 사이에 김(Kim)을 찾는 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었다.”

예정보다 며칠 늦게 집에 돌아오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전화가 몇 통 있었다.

“아직 아프리카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해도 ‘킴, 킴’ 하면서 애타게 찾던데. 그 남자가 누군지 알겠니?”

물론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이름은 임마누엘. 나이는 서른 몇 살, 키는 190cm정도. 아크라에서 두 시간 쯤 떨어진 어느 카카오 농장주인 알폰사 씨의 둘째 부인이 낳은 큰아들이다.

내 이름은 김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이름으로 그만큼 부르기 쉬운 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어감이 좋은 이(Lee)는 이미 중국인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장(Chang)이나 성(Sung)도 마찬가지다. 박(Park)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앞에 존칭을 붙이지 않고서는 도통 사람 이름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임마누엘에게 내 이름은 김이라고 말해주었다. 악의가 아니라 단순한 편의성이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거짓말을 합리화할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죄 없는 변명 뒤에 상대방을 향한 경계심, 또는 인간관계에 대한 게으름이나 무책임함이 숨어있다면.

그 날 아침 나는 가나에 도착한지 만 하루 된 참이었고 그 전날 저녁을 건너 뛰어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눈에 띄는 현지인에게 다가가 붙임성 있게 인사를 건넨 것은 가까운 환전소의 위치를 묻기 위해서였지 친구를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곳은 서울에서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30시간쯤 걸리는 가나의 수도 아크라(Acra)였다. 영어가 통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서구적인 옷차림과 건축물들 때문에 가나의 제1도시는 미국 어디에나 있음직한 평범한 흑인촌처럼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분위기가 그다지 위험스럽지 않다는 것 정도.

후미진 골목에도 얼마든지 사람들이 걸어 다녔고 밤이 되어도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다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전한 수도(capital)’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

“환전소라면 여기서 좀 멀어요. 조금 기다리면 하던 일만 끝내고 내가 데려다 줄게요.”

임마누엘에게 최초의 신뢰가 간 것은 그의 말쑥한 옷차림이나 신원 확실해 보이는 직장- 어느 잘 지은 건물 1층이 사무실이었다-이 아니라 그의 생김새 때문이었다. 매끈하고 통통한 뺨과 벙글벙글 웃고 있는 커다란 입은 어린애 같았고 희끗거리기 시작한 머리와 선량한 미소는 현명한 노인 같았다.

“또 가고 싶은 곳 없어? 어디든 말만 해요.”

고마운 제의에 오히려 갑자기 마음이 매우 무거워지는 것은 진리인지 편견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는 일련의 몇 가지 명제들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매우 위험한 대륙이다.

외국인 여자는 어딜 가든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모조리 털리거나, 얻어터지거나, 기타 불쾌한 경험을 할 수가 있다.

가고 싶은 곳이 없노라고 말하자 임마누엘은 그렇다면 주말을 이용하여 자기 가족 소유의 카카오 농장에 구경을 가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색다른 체험이 될 것이라고.

그는 누구일까. 원래 선하거나, 호기심이 많거나, 또는 길 잃은 외국인에게 무조건 친절한 사람. 아니면 호의의 대가로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진 한국에 지인을 만들어 꽤 진지한 비즈니스를 벌여보려는 실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제안에 응한다면 그것은 가나에서 나고 자란 임마누엘에게 어떤 의미일까.

혼자 여행하는 외국인 여자는 자유연애주의자이다.

1박2일 여행제의를 수락하는 외국인 여자는 더욱 더 자유연애주의자이다.

“한국에서는,” 나는 우리 어머니가 된 기분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정숙한 유부녀라면 보통 이런 제의에 응하지 않아. 그러니까 내 말은, 혹시 농장구경과 문화교류 말고 당신의 이런 제안에 암암리에 뭔가 다른, 그러니까 나처럼 투철한 정조관념을 가진 여자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모종의 건전치 못한......”

여기까지 말했을 때 임마누엘이 펄쩍 뛰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추악한 편견의 실체가 모조리 튀어나올 뻔 했다.

카카오 농장에서 이틀간 머물렀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가족들의 손으로 직접 일궜다는 농장이었다. 임마누엘의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 사촌들, 그리고 여러 일꾼들과 그들의 아내들, 아이들을 만났다. 염소를 한 마리 삶아 나누어 먹고 농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인근 마을을 구경했다.

밤이 되자 검은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떠올랐다. 나는 어디서 자야하나 했더니 방을 하나 치워 침대를 들여놓고 아이스박스에 차가운 물과 음료수 몇 병을 담아준다. 부족한 물자 중에서 가장 좋은 것만 골라 나에게 주려고 했다. 나를 먼저 먹이고, 가장 많이 먹였다. 모두 내게 친절했다.

임마누엘의 어머니가 끓여준 물로 목욕하고 새로 빨아 비누냄새가 풍기는 침대시트를 덮고 잠을 청했다. 임떪㈎ㅐ?다른 일꾼들과 하루 종일 흙투성이가 되어 농장에서 일하느라 식사시간 이외에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조심해서 돌아가요. 서울에 무사히 잘 도착했는지, 너희 집에 전화해서 확인해 볼게.”

하나의 작은 믿음은 강대한 반대증거를 만나 흔적도 없이 부서지고, 어리고 아직 부드러운 편견은 나무뿌리가 굵어지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굳건해지고, 결국 어떤 신념을 가져야 할지, 신념을 갖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 아닌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무조건적으로 누군가에게 친절한 사람도 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에게 무조건이라는 것은 간혹 세상에서 가장 힘든 조건일 것이다.

임마누엘과 그의 가족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요즘 들어 느낀 것인데, 증거들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있고, 어떤 증거는 다른 증거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사실 너무 강력해서 이보다 더 위력적인 증거는 시간이 어지간히 흘러도 마주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길 바란다.

■ 가나의 젖줄 카카오 생산량 전세계 2위

아메리카 대륙 열대산 교목인 카카오는 16세기 유럽으로 전해져 가공법이 발달, 초콜릿과 코코아가 만들어졌다. 수확한 카카오 열매는 쪼개서 씨를 빼낸 뒤 며칠 동안 발효시킨다. 그 후 말리기, 씻기, 볶기, 갈기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페이스트를 얻으며 이것을 압착시켜 코코아버터와 코코아 파우더를 만들거나 코코아버터(또는 다른 함유물)와 혼합하여 초콜릿 제품을 만든다.

가나는 카카오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모노컬처(monoculture)형 경제구조이다. 카카오 생산량은 이웃인 아이보리코스트에 이어 세계 2위로 국제유통량의 약 15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 가나 산 카카오는 품질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아크라(가나)=글ㆍ사진 소설가 박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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