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를 두고 벽지 디자이너라고 했던가. 한 청년이 무료하게 엎드려 방바닥 디자인에 열중이다. 가끔씩 벽지 디자인에도 몰두하지만 왠지 방바닥에만 정이 간다. 잠깐 실직 상태였지만 이 청년은 3개월 후 ‘마루 디자이너’ 반열에 오른다. 동화자연마루 마케팅기획팀 진상현(33) 대리의 5년 전 모습이다.
2002년 입사 당시 마루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그에게도 생소했다. 지금도 국내엔 두 업체를 통틀어 6명이 고작이니 일반인이 느끼는 마루 디자이너는 더 말해서 무엇하리.
그래도 얼마 전 막을 내린 TV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 덕에 내가 뭐 하는 사람이라고 침 튀어가며 입 아프게 설명하는 수고를 덜었다. 진씨가 극 중 나미칠의 남편 유일한의 실제 모델이라는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많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른다면 “나미칠의 남편이 하는 일을 합니다.” 라고 짧게 한마디 하면 된다.
마루 디자이너는 강화마루에 새겨진 나뭇결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드는 일을 담당한다. 세계 어디든 울창한 숲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작업장이다. 나무를 켜고 그 모양을 컴퓨터에 담아 단조로운 부분에는 옹이를 만들고, 너무 복잡한 부분은 단순화해 ‘자연 그대로의 나뭇결보다 더 자연스러운 강화마루’를 만들어 낸다.
1년 365일 눈만 뜨면 나무와 호흡한 덕에 그에게도 직업병이 생겼다. 30개월 된 딸, 부인과 외식하러 가서도 테이블을 만지면 참나무인지, 벚나무인지, 합판을 눌러 붙인 것인지 목재의 종류와 가공방법이 필름 돌리듯 머릿속을 지나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가끔 일어난다. 얼마 전 친척의 집들이에 갔을 때였다. 그 친척은 “새 아파트여서 그런지 마루도 강화마루인데다 오븐에 김치냉장고까지 없는 게 없다”고 자랑을 늘어지게 했었단다.
그런데 ‘아뿔싸’. 마루에 깔린 것은 강화마루가 아니고 무늬만 나무인 폴리염화비닐(PVC) 타일이었다. 아직까지 그 친척이 다른 사람에게 PVC 타일을 강화마루라고 자랑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진씨의 입가엔 짓궂은 웃음이 번진다. ‘아무리 그래도 강화마루하고 PVC 타일을 구분 못 하다니’.
국내에서 활동하는 전문 강화마루 디자이너가 드물기 때문에 진씨는 자신의 작품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혹시라도 초대받아 간 집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강화마루를 만날 때면 흐뭇한 웃음을 감출 길이 없다. 하지만 표정은 담담하게, 한 마디 건넨다. “대단한 안목이시군요.”
진씨가 생각하는 올해 강화마루의 트렌드는 ‘자연스럽게, 좀 더 자연스럽게’ 이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천연 목재의 느낌을 간직한 자연스러운 나무색 마루가 얼마 전까지 인기를 누렸던 바랜 나무색 마루를 제치고 ‘인기순위 1위’를 예약하고 있다.
마루표면의 질감 또한 지나친 광택보다 실재 원목의 광도에 가까운 소재, 옹이나 상처 등 목재의 섬세한 표면 질감을 표현한 제품들이 사랑을 받을 전망이다.
사실 올해 유행은 짧게는 6개월 전, 길게는 1년 6개월을 준비해온 디자인들이다. 평균 1년을 앞두고 예측해야하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트렌드를 분석하는 것은 필수다.
다만 선진국에서 크게 유행했다고 해도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아 마루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야 한다. 그의 손길을 거친 외국산 강화마루나 천연 목재는 한국 사람들의 주거공간을 숲 속의 오두막으로 바꾸는 새로운 상품으로 거듭난다.
“손대면 톱밥이 묻어날 듯, 가시가 손에 박힐 듯, 코를 대면 나무 향기가 날 듯한 강화마루를 만들고 싶습니다.” 역시 마루 디자이너다운 포부다. 그는 “강화마루의 본고장 유럽에 한국산 강화마루가 쫙 깔릴 때까지 창조적인 작업을 멈추지 않을 생각입니다.” 라며 웃어보인다. 33살 경상도 청년은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나무와 컴퓨터 사이에서 씨름 중이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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