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 공연을 끝내고 바로 제작에 들어간 뮤지컬이 <고래사냥> 이었다. 최인호 선생님의 소설을 각색해서 이윤택 선배가 연출을 했고, 음악은 김수철이 만들었다. 남경주 송채환 장두이씨가 주연이었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뮤지컬 투자사도 없었고, 제작비 마련을 위해서는 늘 주변의 친구들을 본의 아니게 괴롭히게 되었다. 고래사냥> 우리집>
친구인 탤런트 강석우가 여러 기업의 협찬을 구해줬고, 학원을 운영하던 친구는 빈 강의실을 연습실로 빌려주기도 했다. 지금 PMC 프러?Z션을 나와 함께 경영하는 공동대표 이광호 사장과의 인연도 이때 만들어졌다. 제작비가 모자라 고등학교 동창인 이광호에게 급하게 부탁을 했고, 광호는 선뜻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다행히 공연을 끝내고 약속한 날짜에 정확하게 갚을 수 있었고, 이후에 광호에게 공동으로 투자하여 뮤지컬 공연제작사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고래사냥> 을 제작하면서 7억원 정도가 들었고 지방공연 때 배우 스태프 등 50명이 넘는 인원이 움직이게 되자, 극단도 기업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자금과 인원의 체계적인 관리도 필요했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제작비용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앞으로는 문화도 ‘산업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업을 경영한 친구 광호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나는 작품을 만들고 너는 관리, 회계 등 경영을 맡아달라.” 고래사냥>
이렇게 하여 96년 12월에 각자 1억씩 투자해서 자본금 2억으로 (주)PMC 프로덕션이 만들어졌다. PMC를 만들면서 내가 올리려고 준비한 공연은 4작품이었다. 연극 <유리동물원> 과 <남자충동> , 뮤지컬 <루브> 그리고 <난타> 였다. <난타> 는 처음부터 세계시장에 진출해 보자는 생각으로 기획했다. <고래사냥> 을 제작하면서 서울공연을 끝내고 지방 몇 도시를 공연하고 나니 더 이상 공연 할 곳이 없었다. 참 아쉬웠다. 2년여를 준비하고 50여명이 정열을 쏟아 만든 작품이 불과 2, 3개월의 공연으로 끝나야 한다는 게 참 안타까웠다. 고래사냥> 난타> 난타> 루브> 남자충동> 유리동물원>
이때 생각한 것이 시장을 넓혀보자는 것이었다. 아시아로 미주로 유럽으로 가지고 나갈만한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큰 장벽이 있었다. 우선은 자본의 한계였다. 당시 <고래사냥> 의 7억원은 국내 공연계에서 최고의 제작비였다. 하지만 세계무대에서 경쟁해야 할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100억원에서 150억원 정도의 사전제작비를 들인 공연들이었다. 고래사냥>
두 번째는 언어의 문제였다. 한국말로 하는 공연을 받아들일 해외의 극장과 관객이 과연 있을까? 고민 끝에 해결책은 우선 아무리 자본이 풍부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제작자들이라고 해도 만들지 못할, 즉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소재의 작품으로 경쟁력을 가져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어가 장벽이라면 언어가 없는 공연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마침 90년대에 들어 세계 공연시장에서는 비언어극이 유행이었다. 사물놀이를 바탕으로 한 비언어극! 이것이 <난타> 기획의 첫 시작이었다. 난타>
/PMC대표ㆍ명지대문화예술학부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