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마당 작은 널 바위 앞 현호색이 연보라 부끄러운 자태로 피어났다. 마른 잔디 풀섶 속에 가냘프게 서있는 이 꽃을 보아야만 나는 봄을 확신한다. 이미 지난 겨울부터 마음 속에 피어난 이 꽃을 가까이 보러 잔디 위에 엎드린다. 꽃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숨죽이면 꽃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아마릴리, 내 사랑'연상시키는
그를 진천 5일장에서 만난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허름한 수레에 커다란 아마릴리스 구근을 수북하게 쌓아놓고는 찾는 손님 없이 한가로이 서있는 그. 지난 해 5월 주문진 장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동해로 떠난 짧은 가족 여행 중 으레 주문진에 들렀고 회를 먹었다. 그리고는 산책하는 동안 그를 만났다. 탐스럽게 큰, 알 수 없는 구근과 더불어 커다란 나팔 같은 빨간 꽃. 턱없이 작아 보이는 하얀 플라스틱 화분. 모든 것이 부조화였으며 회색 주문진 시장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전성기를 지난 꽃잎은 지쳐 보였다. 그는 꽃 이름이 아마릴리스라고 했다. 아! 아마릴리스. 순간 머리 속에는 카치니 줄리오의 노래 '아마릴리, 내 사랑(Amarilli, mia bella)'이 흘렀지만, 이 아름다운 이름이 오답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무심히 지나쳤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떠나는 순간 정말 불현듯, 구근을 사야만 한다는 계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를 세우고 그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지만 그는 없었다. 차에 올라 아우성치는 가족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주문진 시장을 헤매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그는 아마릴리스 아저씨로 불렸다.) 부둣가 주차장에서 그를 발견했고 나는 구근 5개를 샀다.
이후 아마릴리스는 베란다에서 빠알간 큰 꽃을 피웠다. 그런데 꽃을 볼 때마다, 아마릴리스를 되뇔 때마다 그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아마릴리스만 파는 것일까? 비슷한 가격이라면 튤립이 더 팔기 쉬울 텐데…. 어떤 사연으로 인해 아마릴리스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생각만으로 주문진을 다시 찾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쌀쌀한 저녁 시간. 주문진 장에 그는 없었다. 그런 그를 진천 장에서 조우한 것이다. 수북하게 쌓아올린 아마릴리스 구근들 뒤로 그는 조용히 서 있었다. 구근을 종류별로 구입한 후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주문진에서 판 적이 있지 않은지….
● 우연한 세번째 만남을 기다리며
그는 지난 해 5월 주문진에 간 적이 있다고 했다. 바로 그였다. 그는 장을 따라 전국을 다닌다고 했다. 진천장은 고향 근처라 오는데 멀리 저 남쪽까지도 간다고 했다.
오로지 아마릴리스만 가지고…. 더욱 신비해지는 이 아저씨. 고향이 충북 무극이라는 사실만 알았다. 연락을 위해 명함을 달랬더니 언젠가 어느 장터에서 만날 일이 있을 거라나? 연로한 아버님만 아니었다면 막걸리라도 나누며 궁금한 사연을 알아보았을 텐데….
아마릴리스 아저씨에 대한 기억에 진천 장터가 더해지면서 나는 믿는다. 세 번째 만남을…. 우연히 만나 봄마다 그리는 현호색처럼 아마릴리스 아저씨도 그러한 것 같다.
황성호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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