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을 향한 그리움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은 어떤 낭만주의의 심리적 질료들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고향을 그리워할 때 그 고향은 그리움의 주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마련이고, 먼 곳을 그리워할 때 그리움의 주체는 그 먼 곳을 제 진짜 고향으로(그러니까 자신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에 발을 헛디뎌,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곳에 잘못 태어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이 스물 넘어 삶과 세상에 대한 내 생각을 정돈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낭만주의자가 되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낭만주의의 주정적(主情的) 무절제와 허튼 몽상이 그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해롭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성이라 부르든 합리성이라 부르든, 나는 어떤 질서와 규율을 내 삶과 마음 속에 장착하고 싶었다. 논리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윤리와 심미의 수준에서도.
그러나 나는 실패했다. 타고난 그릇을 나는 부술 수가 없었다. 이런 실패 경험은, 사람은 어떤 거푸집에 갇혀 그 모양대로 ‘태어나게’ 마련이라는(그러니까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내 우파적 인간관의 핑계가 되었다. 내 생각이나 행동은 늘 넘치거나 모자랐다. 모자람도 넘침의 일종이라면(과소!), 나는 늘 넘쳤다.
특히 쾌락을 쫓아 구하는 데서 나는 절제를 몰랐다. 내 몸뚱어리를 동년배보다 한결 낡게 만든 (심한) 니코틴 중독과 (약간의) 알코올 중독은 그렇게 얻어졌을 것이다. 손 닿는 자리에 디스플러스가 없으면, 온전한 와인 병이나 먹다 남은 위스키 병이 냉장고나 선반 어딘가에 있지 않으면 나는 불안하다.
내가 탐한 것이 술과 담배만은 아니다. 나는 특정한 음식을 지독히 탐한다. 스키야키(鋤燒), 연어 회, 낙지볶음, 안심 스테이크, 생굴 같은 것들. 이 이름들을 벌여놓고 있자니 어느 새 입에 침이 고인다. 나이가 좀 든 뒤에는 달라졌으나, 한 때 나는 멜로드라마 폐인이기도 했다. 나는 하염없는 감상주의자(였)다. 이성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이 모자랐던 탓에, 나는 늘 주변인으로 살았다. 크고 작은 공동체의 변두리에, 안과 밖의 경계에 내 자리가 있었다.
그 가두리의 자리를 나는 자유의 자리로 여겼다. 그 자유는 패배의 대가로 얻은 자유였다. 그러니까 내가 일종의 낭만주의자라 하더라도, 그 낭만주의는 영웅적 낭만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패배를 예상하거나 예정한, 소극적 도피적 낭만주의다.
싱그러운 젊음의 세월을 보내며 그랬듯, 지금도 나는 먼 곳을 향한 그리움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에서 놓여 나지 못한다. <도시의 기억> 이라는 이 연재물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도 먼 고향들에 대한 그 그리움에서 주어졌다. 도시의>
그 먼 고향들 가운데 내가 제일 먼저 가보았고 가장 오래 떠나 있었던 곳이 나라(奈良)다. 상투적 표현을 쓰자면, 나는 내 마음을 나라에 두고 왔다. 그 마음의 고향에 내가 얼마나 머물렀나? 딱 하루다. 1990년 8월7일 한 나절.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그 도시에, 내 마음의 고향에 가보지 못했다.
독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비웃음 소리가. 단지 하루 들렀을 뿐인 도시에 향수를 느끼다니. 그렇지만 거기 들렀던 기간이 그리 짧았기에 내 향수는 더 짙어진다.
그리 짧게 머물렀기에, 그 먼 고향을 향한 내 그리움은 식을 줄 모른다. 그리움이란, 결핍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사랑 아닌가. 오래 머물렀다면, 나는 그 도시를 조금은 싫어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 도시의 (누릿하거나 비릿할지도 모를) 속살을 설핏 엿보게 됐을지도 모른다.
찌는 듯 더운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햇빛이 내리쬈고 그 뜨거운 볕은, 흔히 사슴공원이라 부르는 나라공원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환각 비슷한 것을 내 몸 한 구석에 만들어냈다. 방금 ‘우리’라고 한 것은 동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요즘은 평론 활동을 거의 접은 듯하니 국문학자라 해 두자) 김철 형과 홍정선 형이었다. 거기 사슴이 있었다. 어린 시절 창경원의 동물원 우리 너머로 본 사슴들이. 도시 한 복판의 턱 트인 공원에서 그들은 사람들과 어우러져 있었다.
나는 한 순간 어질어질함을 느꼈는데, 그것이 뜨거운 햇볕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는 사슴들의 맹랑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시카센베이(鹿煎餠)라 부르는 사슴 먹이를 내 동행 가운데 한 사람이(김이었는지 홍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사서 이 친구들을 꼬드겼다. 신기하게도 그들이 다가왔다.
물론 그것은 매우 인공적인 풍경이었다. 사슴공원 자체가 사람의 손길을 세심히 받아 그야말로 인공적으로 아름다웠고, 그 곳은 사슴들이 자연스레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이 사슴공원이 일종의 극장무대나 쇼케이스 같은 곳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 풍경에 완전히 반했다. 그래서 문득, 이 곳의 관람객이 아니라 배우나 진열품이 되고 싶었다. 다시 말해, 내가 서울말고 다른 곳에서 살게 된다면, 나라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른 입술을 아이스크림으로 적시며.
나라는 섬세하고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거대했다. 적어도 도다이지(東大寺)는 그랬다. 이 우람찬 사찰은 내가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이어령 상표의 ‘축소지향 일본인’ 운운 이미지를 송두리째 뒤집어놓았다. 중학생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가장 크게 실망한 것이 석굴암을 보고 나서였다.
사실 석굴암만이 아니라 경주의 신라 유적들에 죄다 실망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 유적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찬란한가에 대해 반복적으로 세뇌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예술품의 섬세함에 감탄할 눈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니 중학생 때는 오죽했으랴. 내가 경주의 신라 유적들을 보고 실망했다는 것은 그 규모에 실망했다는 뜻이다. 경주에서, 나는 상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충격을 받으며, 문득 완구(玩具)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국사엘 들렀을 땐, 서울에서 보던 절들보단 엄청 크군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7년쯤 뒤 나라의 도다이지엘 가보니, 오래 전에 본 불국사는 일종의 분재(盆栽) 사찰 같았다.
도다이지는 세 겹의 크기로 나를 압도했다. 우선 그 터(寺域)의 넓음이 나를 압도했고, 대불전(金堂)의 크기가 나를 압도했고, 대불전 안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크기가 나를 압도했다. 사슴공원의 오밀조밀함과 도다이지의 거대함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다면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나는 일본의 절들이 다 도다이지처럼 크진 않다는 걸 이내 알게 됐다. 도다이지의 대불전은 일본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목조 건물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일본은 한국에 견주는 것조차 민망할 만큼 큰 나라다. 경제력이 세계에서 두 번째라는 점을 제쳐놓고라도 그렇다.
인구가 남북한의 두 배고 국토 면적도 그렇다. 더구나 그 국토는 아열대에서 아한대까지 길게 뻗어있다. 그러니 한국에서 겪지 못한 ‘크기’를 일본에서 겪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닐 테다.
그래도 일본에서 처음 본 절의 웅장함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이 커다란 목조건물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미군 쪽에서 문화유물의 폭격을 세심하게 피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근년의 이라크 침공 때 미군이 영국군과 함께 저지른 문화적 밴덜리즘을 보면 그 나라의 ‘문화주의’에 일관성이 있는 것 같진 않다.
미국인들에게도 존중하는 적과 존중하지 않는 적이 따로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을 해 놓고 보니, 일본이 역사상 유일의 핵무기 피폭국이라는 데 생각이 곧 미친다. 가정된 역사처럼 부질없는 물건도 없지만, 1945년 8월까지 나치 정권이 존속했다면, 미국은 유럽에도 핵폭탄을 떨어뜨렸을까?
도다이지 사역 안이었는지 그 둘레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ㆍ1883~1971)가 종전 뒤 한 때 머물렀다는 집이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홍정선 형이 그 집을 찾아보자 해서 물어 물어 간 것이다. 그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은 내게, 시가 나오야는 소설가로보다 종전 뒤 일본어를 폐지하고 프랑스어를 일본의 ‘국어’로 삼자고 주장한 논객으로 더 기억된다.
시가 나오야의 이 주장은 두 겹으로 뜻밖이다. 작가는, 특히 군소작가가 아니라 시가 나오야 정도로 자국 문단을 쥐락펴락하는 작가라면, 어려서 배워 자신이 평생 써온 모국어에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큰 집착을 보이게 마련이다.
이미 원로의 반열에 든 시가 나오야가 일본어를 폐지하자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이 그 때까지 써온 작품을 죄다 폐기할 각오가 돼 있었다는 뜻이다. 이리도 강렬한 자기파괴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됐을 정도로 일본어는 그에게 허접스레 보였을까?
둘째로, 그가 일본어를 대치할 언어로 지목한 것이 왜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을까? 시가 나오야가 이런 주장을 펼친 반세기 전에도, 자연언어 생태계에서 프랑스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영어에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낮았다. 게다가 시가 나오야가 프랑스어나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프랑스어에 익숙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는 근대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고 앙투안 리바롤이라는 18세기 남자가 그릇된 정보와 근거 없는 자부심에 바탕을 두고 조작해낸 ‘프랑스어의 보편성’ 신화에 감염돼 있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시가 나오야의 ‘프랑스어 국어론’은 20세기 일본 지식 사회 한켠에 똬리를 틀고 있던 프랑스 애호의 증좌라 할 만하다. 일본인들의 프랑스 애호는 프랑스 쪽?그 대칭물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우키요에(浮世繪)에 홀딱 반했던 몇몇 인상파 화가들이 아니더라도, 프랑스인들의 일본 애호는 일본인들의 프랑스 애호 못지 않은 것 같다.
나라에서 겪은 사사로운 에피소드 하나. 국제조선어학 학술토론회에 참가한 동독 훔볼트대학 한국학자 헬가 피히트 여사와의 인터뷰 기사를 오사카에서 부치지 못하고 나라에까지 들고 왔는데, 도무지 팩시밀리 있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물어 물어 찾아간 ‘정식’ 우체국(몇 군데 간이우체국에는 팩시밀리가 없었다!)에서 마감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춰 송고하긴 했으나, 기술제국 일본에서 팩시밀리를 찾기 어렵다는 게 뜻밖이었다.
인터넷이 대중화한 지금 돌이켜 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풍경이다. 그보다 전, 텔레타이프와 전화에 의존해야 했던, 아니 그것들조차 없었던 시절의 기자들은 먼 곳에서 쓴 기사를 송고할 때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제 원고를 기다리는 머나먼, 그리운 고향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늙은 도시 나라에서의 한 나절, 내 몸뚱어리는 젊었다. 나라를 향한 그리움은 그 젊은 몸뚱어리를 향한 그리움인지도 모르겠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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