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중국 상하이 중심 상권인 난징루(南京路)에 위치한 이세탄 백화점 2층. 주말을 맞아 중국의 20, 30대 여성들이 한국 여성의류업체 보끌레 머천다이징의 ‘더블유닷’ 매장에서 옷을 사기위해 끊임없이 몰려왔다.
한 여성은 상의와 치마를 입어본 후 구두까지 신어보더니 전부 사 들고 가게를 빠져 나갔다. 이 매장 강영철 총경리는 “1년에 옷값으로만 4,000만원 정도를 쓰는 고객도 있다”며 “상하이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부자들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중국은 매력적인 소비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게 중국 전문가들지적이다.
같은 날 저녁 8시께 한국 음식점 ‘본가’에 들어서자 500여평 규모의 식당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차 있었다. 손님 대부분이 한국인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곳곳에서 중국말이 들려왔다.
이 식당의 주 메뉴인 우삽겹은 1인분에 80위안(9,700원) 정도로 일반 중국인에게는 부담스러운 액수. 하지만 각 테이블의 중국 손님들은 다양한 한국음식을 푸짐하게 먹고 있었다.
본가 관계자는 “개업 초기에는 한국인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절반 가량은 중국인”이라며 “한 명당 소비액을 따져보면 한국인보다 오히려 더 많다”고 귀띔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 뿐만 아니라 거대한 소비 대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인건비 상승, 세제 혜택 감소, 환경 규제 등으로 가공무역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반면 중국인들의 주머니사정이 넉넉해지면서 내수 소비시장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도시가구 1인당 가처분 소득은 2002년 7,703위안에서 지난해 1만 1,759위안(한화로 140여만원)으로 중국인들의 씀씀이가 커졌다.
특히 80년 중국의 1가구 1자녀 갖기 운동 이후 태어난 샤오황디(小皇帝)들이 점차 사회에 진출하면서 소비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LG경제연구소는 최근 “2억명에 달하는 샤오황디들이 소비패턴을 바꾸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만큼 이들을 집중 공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가ㆍ차별화 전략으로 중산층 공략
‘소비 대국’ 중국을 잡기 위한 기업들의 총성 없는 전쟁은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90년대 중ㆍ후반 이마트와 CJ홈쇼핑이 진출한 것을 필두로 이랜드, SK네트웍스 등의 의류 업체와 파리바게뜨, 본가, BBQ, 놀부 등 요식 업체들도 잇따라 만리장성을 넘어 본토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시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CJ홈쇼핑은 요즘 중국 각지에서 함께 사업을 하자는 제안이 잇따라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중국중앙정부가 300조원대로 추정되는 홈쇼핑 시장을 진작시키기 위해 각 성급에 홈쇼핑을 육성하라는 지시를 내린 데 따른 현상이다.
SK네트웍스의 여성의류 브랜드 ‘아이겐포스트’는 중산층을 겨냥한 고가 전략으로 대박을 터뜨린 대표적인 사례다. 이 업체는 2005년 중국에 진출해 1년새 점포를 30여개까지 늘렸다.
국내시장에서 3년 전 문을 닫은 것을 감안하면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된 셈이다. 비결은 중상층 이상의 고객 층을 겨냥한 고가 전략에 있었다.
국내에서는 서울 강남, 종로 등지의 로드숍에서 남녀 의류를 중저가에 판매하다 쓴 맛을 봤지만 중국에서는 20대 전문직 여성을 위한 고가의 여성의류만으로 승부를 걸었다.
김관수 총경리는 “중국에서는 샤오황디 세대인 20대 초ㆍ중반 여성들이 가장 구매력이 있다”며 “급증하고 있는 중산층을 잡기 위한 각종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요식업체들은 차별화한 서비스로 중국인들을 사로잡는데 주력하고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에 22개 점포를 연 파리바게뜨는 중국업체와는 달리 갓구운 빵을 점포에서 바로 파는 방법으로 성공했다.
황희철 총경리는 “중국 중산층은 의외로 소비가 합리적이고 깐깐하다”며 “남다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소비의 불모지로 여겨졌던 내륙지역도 새로운 소비시장으로 조명받고 있다. 여성의류업체 보끌레 머천다이징의 경우 쓰촨성 (四川省) 청두(成都) 왕푸징 ‘더블유닷’ 매장이 전국 매장에서는 처음으로 한달 매출액 300만 위안을 뛰어 넘는 기염을 토했다.
이 곳은 중국 남서부 양쯔강 상류에 위치한 내륙이어서 유통 기업들의 진출이 더딘 곳 중에 하나였다. 강영수 총경리는 “내륙지역에서 이렇게 소비가 늘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대도시 중심 시장에서 점차 내륙으로 점포를 늘려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이 살 길
중국이 거대소비시장으로 부상했지만, 철저한 시장조사와 현지화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실제로 이랜드는 중저가 남녀 의류를 로드숍에서 팔다 실패를 맛본 후 고가의 여성의류 판매로 마케팅을 전환한 후에야 중국 사업을 본궤도에 올랐다.
휴대폰 제조업체인 독일 지멘스도 제품 디자인을 중국이 아닌 본사에서 하면서 제품을 제때에 출시하고 못했고, 결국 소비자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반면 아이겐포스트는 중국법인 직원 60명 가운데 80%가 중국인일 정도로 현지화에 승부를 걸고 있다. 디자인, 생산, 유통 등 모든 과정이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다민족 국가인데다 지역적으로도 취향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 디자인도 달리 하고 있다. 이 회사 디자이너 오수경씨는 “중국은 남북간의 온도차가 최대 40도가 나기 때문에 한국식 계절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며 “지역별로 좋아하는 색깔과 금기시하는 문양이 있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트라 상하이 무역관 박한진 차장은 “중국은 영토가 워낙 넓은데다 소득계층도 다양해 지역별, 계층별 마케팅 전략이 필수적”이라며 “값싸고 다양한 물건들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더 이상 박리다매식의 마케팅은 통하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 류더화 주세요?
중국인들을 흔히 만만디(慢慢的ㆍ행동이 굼뜨거나 어리숙함)하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항상 ‘메이??시’(상관없다)나 ‘커이’(가능하다)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언뜻 보기엔 사람좋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지갑을 여는 일은 만리장성을 뛰어 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중국시장에서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만큼 브랜드 파워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기업간 기술격차가 좁아지면서 상품의 질은 평준화되는 반면 브랜드에 따른 소비 격차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인지도 제고가 중국 진출의 핵심 요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실제로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거나 업종의 특성을 잘 표현한 이름으로 각광받는 브랜드가 적지 않다. 한국 할인점의 대표주자인 이마트의 중국 이름은 이마이더(易賣得).
이마트라는 본래 이름과 비슷하고, 뜻도 ‘쉽게 살 수 있다’여서 할인점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홍콩 영화배우인 류더화(劉德華)와 발음이 같은 수정액(流得滑)이나 중국 배우 씨에팅펑(謝霆鋒)과 발음이 같은 지사제(瀉停封ㆍ설사를 멈추게 하는 봉지)는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소비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선 경우다.
반면 다국적 기업들도 중국에 대한 몰이해와 지식부족으로 낭패를 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나이키는 서양 농구선수가 중국 할아버지와 1대 1 농구 경기를 하다 서양선수에 밀려 할아버지가 넘어지는 장면이 담긴 CF를 내보냈다가 하루 만에 광고를 내려야 했다.
젊은이의 패기를 표현하려던 당초 의도와는 달리 윗사람을 무시하는 서양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로 비쳤기 때문이다. KFC의 경우 감자칩만 먹고 놀던 학생이 열심히 공부한 동료들을 제치고 대학에 합격하는 내용이, 맥도날드는 중국 젊은이가 햄버거가 너무 맛있어서 무릎을 꿇은 채 점주에게 ‘하나만 더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중국인들의 반발을 샀다.
일본 도요타 자동차는 고급 세단 렉서스가 지나가자 천안문 광장의 사자상이 거수경례를 하는 내용이 나간 뒤 중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상징인 사자가 일본차에 경례를 한다는 광고를 중국인들로썬 용납할 수 없었던 셈이다.
코트라 상하이 무역관 박한진 차장은 “중국인들은 중화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어 자존심을 건드릴 경우에는 불매운동도 불사한다”며 “소비시장에서 브랜드의 역할도 강해지는 만큼 이름을 붙일 때 다각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안형영기자 promethe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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