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이나 맥주는 10년이 지나도 먹을 수 있다는 건가요?“
회사원 박태현(35)씨는 최근 감기몸살로 병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2개를 샀다. 집에서 한 입 떠 먹은 아이스크림은 텁텁한 느낌 뿐이었다. “깨알 같은 얼음알갱이가 혀에 사각사각 감겨 드는 맛은 어디 갔지. 몸살 탓에 그런가.”
고개를 흔들던 그는 우연히 겉포장에 제조연월일과 유통기한을 살펴봤다. 아무 표시도 없었다.“언제 만든 지도 모르는 제품을 먹으라니….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데 기분이 매우 께름칙해졌다.
얼마 전 부서 회식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 동료가 “술은 익을수록 맛이라지만 맥주는 일반적인 보관상태에 따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맛이 변한다”며 한참 마시고 있던 맥주의 유통기한이 언제인지 알아 맞춰 보라고 했다. 아무도 몰랐다.
당연히 유통기한 표시가 있겠거니 하고 이리저리 뜯어봤지만 영어알파벳과 숫자를 조합한 제품식별 번호밖에 없었다. 제조연월일은 있지만 유통기한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암호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고 언제까지 먹을 수 있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생산자 중심 표기뿐이었다.
박씨는 법제처 법령 시민평가단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바로 식품 표기 등의 법규를 찾아봤다. 놀랍게도 주류와 아이스크림류는 제조연월일, 유통기한 표시가 의무사항이 아니었다. 껌과 설탕, 소금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이스크림에 유통기한 등을 표시했다는 TV광고도 있다”며 “소비자가 신선한 제품을 맛보도록 하는 게 업체의 의무인데 도리어 판매 전략으로 활용하는 걸 보니 씁쓸하다”고 말했다.
건축디자인 회사 ㈜아누 기획실장인 박씨는 용기 디자인을 변화시키면 관련 정보를 다 담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뭔지도 모를 성분을 깨알처럼 적어놓기보단 주변 온도나 시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신호등 표시 스티커를 부착하는 간단한 디자인 변경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박씨는 26일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에 ‘아이스크림, 빙과류에도 유통기한을 표시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
■ 한국일보·희망제작소가 알아봤습니다
유통기한 없이 유통되는 제품은 얼마나 될까. ‘의외로’ 많다. 식품의약품안전청 고시에 따르면 아이스크림 빙과류 설탕 소금 얼음 껌 술 등은 제품 포장 겉면에 유통기한을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제조일자 표시로 대체하고 있을 뿐이다. 유통기한이 없는 제품은 조금 과장하면 소비자만 모른다면 10년이 지나도 먹고 마실 수 있다는 뜻이다.
식약청과 제조업체에서는 시간이 흘러도 품질 변형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제품은 유통기한을 기재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흔치는 않겠지만 가게 냉장고 속의 아이스크림이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안전성 여부를 떠나 선뜻 집을 소비자는 드물다.
●유통기한 있어도 알아보기 힘들어
유통기한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는 제품에 대해서도 소비자들의 불만은 높다. 지난해 10월 희망제작소가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식품 유통기한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소비자 4명 중 3명은 식품 구입 때 반드시 유통기한을 확인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제품에 기재된 유통기한을 찾기 어렵다는 응답이 절반에 가까웠다. 찾고 싶어도 쉽게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응답자의 72.8%는 유통기한을 눈에 잘 띄는 포장지 윗면 앞쪽에 기재해야 한다는 제안까지 했다.
식품뿐만 아니다. 주부 김성희(35)씨는 “집에서 쓰는 화장품의 사용기한을 확인할 수 없어 불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화장품은 제조일자만 표기토록 돼있어 사용기한을 알 수 없다. 더구나 화장품 용기에는 제조일자 표시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기재돼 찾기도 힘들다.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포장지와 용기에 사용기한을 표시하도록 의무화했지만 면적이 작으면 표기를 생략할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뒀다. 따라서 연고 등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제품은 사용기한을 전혀 알 수 없는 예가 흔하다.
●낱개 제품에도 유통기한 표시해야
주류 업체 사이에서 최근 소비자 눈높이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맥주는 유통기한 표기 예외 제품이지만 하이트맥주를 비롯한 국내 제조업체들은 지난해 8월부터 ‘음용권장기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제조일자로부터 6개월~1년 이내에 마셔야 가장 깔끔하고 상쾌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안내문을 달아 소비자에게 제품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유통기한을 눈에 띄게 표시한 일부 제품도 호평을 받고 있다. 크라운제과는 제품 포장지 밑면에 유통기한뿐만 아니라 제조일자도 병기해 소비자들이 손쉽게 식별하도록 배려했다.
흰색 바탕에 검정색 글씨로 기재된 데다 포장지에 적힌 다른 제품 정보와 비교해 글씨도 크고 색깔도 달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롯데햄에서 만드는 스틱소시지에는 업계 최초로 낱개 제품에 유통기한이 표시됐다. 포장 제품 겉에만 유통기한을 표시해 실제로 소비자들이 포장을 뜯어내고 낱개로 제품을 먹을 때는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불편함을 해소했다.
●업체가 자율적으로 나서야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아이스크림의 경우 낱개 제품에도 제조일자를 표기토록 지난해 말 고시를 개정했다. 이영희 조사관은 “소비자들 요구가 많아 6개월 동안 유예기간을 둔 뒤 올해 7월부터 시행키로 했다”고 말했다.
식약청도 시민단체에서 제기한 ‘유통기한 의무화’ 요구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 희망제작소는 지난해 유통기한 예외 품목을 가능한 한 모두 없애고 필요하다면 ‘유통기한 필요 없음’ 이라는 문구를 삽입토록 요청했다. 낱개 단위로 포장된 제품은 박스와 개별 제품 모두 유통기한을 표시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식약청 이창준 식품안전정책팀장은 “유통기한 표기 명칭, 위치, 글자크기 등을 일괄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해외 사례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금년 내에 고시 개정방향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희망제작소 정기연 연구원은 “유통기한은 소비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지만 업체가 표기를 소홀히 하고 있다”며 “국가에서 강제 기준을 정할 수도 있지만 업체가 자율적으로 표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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