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여수 가서 돈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남해안의 항구도시이자 수산도시인 전남 여수의 넉넉한 살림살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 말은 여수의 수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1960, 70년대까지는 통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다 옛날 얘기요. 여수 연안에서 물고기가 잡혀야 뭘 해먹죠. 쥐포가공공장으로 번창하던 오천지방산단도 문 닫기 직전입니다. 이제 수산업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요.” 오천산단 내 수산물식품가공협동조합 유지정 전무의 넋두리에서 옛 시절의 영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여수지역 근로자 5인 이상의 제조업체 326개 중 수산관련 업체는 30%에 불과하다.
여수가 해양도시라는 명성을 잃고 이렇게 쇠잔하고 마는 것일까. “여수는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반드시 부활할 겁니다.” 여수시청 공무원 김용만(44)씨의 말이다.
여수가 30여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바닷가 한쪽에선 대규모 오션리조트 조성공사가 한창이고, 도심 곳곳에는 아스팔트가 새롭게 깔리고 있다. 차일피일 미뤄지던 도로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고 시민들도 예년과는 사뭇 다른 활기찬 모습이다. 해양을 주제로 한 ‘2012 여수 세계박람회’ 효과 덕분이다.
실제 ‘강소(强小) 해양도시’로의 재도약을 선언한 여수는 침체된 지역발전의 활로를 세계박람회에서 찾고 있다. 세계박람회사무국(BIE)의 현지 실사(4월9~13일)을 앞둔 여수시민들도 세계박람회 유치를 통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소호동의 한 식당에서 만난 홍정수(42)씨는 “박람회가 지역발전을 30년 이상 앞당긴다는데 반드시 유치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여수를 예전의 잘 사는 동네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여수시민들은 이미 한차례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기에 이번 유치에 거는 기대는 더 절실하다. 시민들은 그래서 ‘2002년 12월3일’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이 날은 모로코에서 열린 2010년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 투표에서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여수가 중국 상하이에 밀려 탈락한 날이다. 박람회 유치를 자축하기 위해 수백여명의 시민들이 모여있던 여수시 제2청사 회의실은 순간 눈물바다가 됐다.
여서동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박계성(45)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어요. 시민들 모두 지역발전을 위해 내일처럼 정말 열심히 유치활동을 했고, 성공을 장담했는데 실패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어요. 게다가 정부의 외교력 부족과 무관심이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되면서 시민들은 상당기간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깊은 절망감과 무기력에 빠져 있던 시민들은 그러나 다시 일어섰다.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된다”며 범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사비까지 털어가며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 세계박람회 재도전의 필요성을 알렸다. 정부는 마침내 2004년 12월 ‘2012년 세계박람회 여수 유치’를 국가계획으로 확정했다.
이처럼 세계박람회는 여수시민들의 성향까지 바꿔 놓았다. 민간단체인 세계박람회 여수시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혜정(43)씨는 “자원봉사를 통해 시민들이 결속력을 키우고 공동체 의식도 회복해 가고 있다”면서 “박람회 유치 성공여부를 떠나 시민들이 말로 표현 못할 정신적 충만감을 갖게 됐다는 게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박람회 유치를 향한 계속된 도전이 여수시민들을 화합하게 하고 긍정적이고 도전적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실제 길거리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수 나서 가로수를 정비하며 꽃 길을 만들고, 거리청소를 하는 시민들이 쉽게 눈에 띈다.
물론 시민들의 뜨거운 유치열기에는 박람회의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가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를 유치할 경우 3개월 행사기간동안 80개국 795만명의 관람객이 찾아 10조300억원의 생산유발효과와 4조100억원의 부가가치효과가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풍부한 해양자원을 갖춘 남해안 일대에 도로와 철도,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이 들어서면서 관광과 생산기반이 형성돼 경남 진주 등 남해안권의 획기적인 발전도 예상된다.
특히 박람회 부지인 신항 일대가 국제 관광ㆍ레저단지와 해양관련 첨단과학기술의 전시 항만으로 조성되면 명실상부한 ‘미래형 해양도시’로 변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박람회 개최 효과에도 불구하고 여수 세계박람회가 정작 여수만의 행사로 알려져 있는 것은 문제다.
전남대 한병세(경상학부)교수는 “국토균형발전과 동서화합을 이룰 수 있는 국가적인 대명제인 세계박람회 유치가 여수만의 이벤트로 비춰져 안타깝다”며 “해양을 주제로 한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는 우리나라가 세계 해양강국으로 거듭나겠다는 국가경영전략도 깔려 있는 만큼 전 국민의 박람회 유치 공감대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람회 유치를 위한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력관계도 절실하지만 아직 미흡한 것도 사실이다. 경제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박람회 유치의 결정적인 요인은 외교력과 돈이다.
실제 2005년 아이치 박람회를 유치한 일본은 도요타자동차와 손을 잡고 BIE 회원국과 미가맹국에 회비와 가입비를 대주는 득표전략을 펼쳐 경쟁국인 캐나다를 따돌렸다.
여수=안경호기자 khan@hk.co.kr
■ 모로코·폴란드와 경합 외교력 등 우리가 우위
2012년 세계박람회 유치전에 뛰어든 국가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모로코(탕헤르)와 폴란드(브로츠와프) 등 3개국이다.
이들은 세계박람회사무국(BIE) 개최 신청국 실사가 시작되면서 98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유치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프리카ㆍ이슬람권 국가와 유대관계가 끈끈한 모로코는 국왕이 세계박람회 유치의지를 강력 표명하고 직접 유치활동을 진두지휘할 정도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모로코는 이슬람 및 아프리카 최초 개최, 그리고 개발도상국가의 유치 필요성을 내세우며 세 몰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BIE 회원국 중 미수교 국가 32개국을 포함해 44개국에 해외 상주공관이 없어 외교 인프라가 취약하다는 게 부담이다.
2004년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입으로 유럽무대에서 활발한 외교력을 발휘하고 있는 폴란드는 최근 중국에 유치사절단을 보내는 등 아시아권 공략에 나서고 있다. 일본에도 유치사절단을 파견키로 했다.
폴란드는 다만 연정체제 붕괴 위기 등 국내정치 불안과 약한 경제력은 취약점으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경쟁국에 비해 외교력과 박람회 주제의 시의성, 풍부한 국제행사 개최경험, 지역개발 파급효과, 경제력 등에서 우위에 있다고 보고, 박람회 참여 개도국에 대한 재정지원 등을 통해 우위를 점한다는 계획이다.
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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