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문 카페에서 후배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내에서 업무 성적이 최고가 나올 정도로 일을 하는 데도 번번이 승진에서 밀린다는 내용이었다. 임신해서 다른 동료에게 밀린 적도 있고, 인사문제에 노조가 관여하면서부터는 성격이 칼 같은 그녀가 밉보였는지 노조가 최악의 점수를 줬다는 것이다.
어찌나 상처를 받았던지 1980년대 운동을 했던 그녀는 화이트 노조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좋겠다는 극단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 악착같이 살아 남아야겠다고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 성적 좋아도 승진 안 되는 후배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군말 없이 한 달에 두세 번씩 외국 출장을 다녀오고,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친구라 마음이 아팠다. 물 위의 백조가 수면 아래로는 발을 동동거린다고 그녀의 유능함 아래, 화장하지 않은 맨 얼굴과 10년 째 똑 같은 헤어스타일, 고달픈 업무를 마무리하고 외국의 호텔방에서 불은 젖을 짜야 하는 불편함, 출근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침마다 아이와 실랑이하는 상황을 알기에 더욱 속상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과연 남자였어도 성격이 모났다고 업무력 있는 누군가를 번번이 승진에서 탈락시켰을까. 왜 제대로 일하려는 여자들은 순하고 흔연하게 정도를 밟는 대신, 언제나 악착같이 버텨야만 하는가.
전도유망한 업종에 여성인력이 대거 진출하고 여성 총리, 강력한 여성 대통령 후보마저 나타나는 추세여서, 우리 사회는 요즘 여권신장에 자부심을 느끼는 눈치다. 하버드 대학에 최초의 여성 총장이 나왔을 때는 마치 우리 사회에 그런 일이 일어난 듯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그 호들갑 한 쪽에는 줄어드는 남성의 기득권에 대한 불안도 상당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성장이 아니라 일하는 여자의 관점에서 속살을 살펴보면, 아직 우리 여성의 정체성은 구한말 수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조차 모범생 같은 성실함, 나서지 않는 겸손함, 손해 보는 것에 대해 따지지 않는 온순함 등 수동적인 특성을 일하는 여성의 미덕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아직도 온순함만 미덕으로 간주
만약 일하는 그녀들이 피로의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가며 비범하게 일을 해낸다면, 비서처럼 뒤에 있지 않고 전면에 나서서 권리를 주장한다면, 혹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면 이기적이고 조직에 위배되는 인간, 돌연변이로 한강에서 튀어 오른 괴물로 취급받는 것이다.
그러니 이 구조에서 살아 남으려면 악착같아지거나, 수동성을 내면화시킬 밖에. 이름을 거론해서 미안하지만, 손숙씨나 강금실씨처럼 정계로 진출했던 많은 여성들을 따라다닌 구설과 달리 후덕해 보이는 한명숙씨에 대해 세상이 관대한 것도 역시 같은 이치 아닌가.
후배에겐 줄리에트 비노쉬를 닮은 갓난아이 딸이 있다. 최근 나는 그녀가 딸에게 젖을 물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꼬마 비노쉬도 언젠간 커서 엄마처럼 일하겠지. 그 때를 위해 그녀가, 이 세상의 모든 일하는 그녀들이 악착같이 버텨주길.
김명화 극작·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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