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를 꿈꾸던 한모(19)군은 고교에 입학하던 2005년 한 기획사의 연습생으로 발탁됐다. 모처럼 찾아온 행운을 놓칠 새라 그는 혹독한 조련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타의 꿈은 매주 경남 통영시와 서울을 오가는 강행군도 잊게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얼마되지 않아 물거품이 됐다. 기획사가 해체됐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교습비 명목으로 낸 1,000여만원도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그는“잠시 맛 본 신기루를 거부할 수 없어”고3이 된 지금도 연예기획사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연예인 권하는 사회’다. 연예인은 청소년 선호 직업 1위를 차지한 지 오래다. 대형 연예기획사의 공개 오디션장이나 연기ㆍ음악학원은 예비 스타를 꿈꾸는 10~20대 젊은 연예인 지망생들로 넘쳐 난다.
하지만 ‘연예 고시’라고 불릴 만큼 험난한 도전 과정 곳곳에 희생자를 노리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23일 경찰에 구속된 원모(26)씨도 청소년들의 꿈과 허영심을 겨냥했다. 연예인 매니저 등으로 한 두달 일한 경험이 전부인 그는 2004년 6월 스스로 ‘잘 나가는’드라마 제작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해외 유명대학을 졸업한 연예기획사 대표가 그가 사칭한 타이틀이었다. 그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드라마와 뮤직비디오에 출연시켜 주겠다’고 10대와 20대를 유혹했다.
그가 1년 6개월 동안 해외드라마 촬영 보조금, 연예인 협회ㆍ노조 가입비, 감독 및 작가 소개비로 43명에게 뜯어낸 돈은 2억4,000여 만원. 피해자 박모(21)씨는 “연예계의 시시콜콜한 일을 알고 있는 데다 구체적으로 성형할 부위까지 알려줘 의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원씨의 권유를 받고 1,500만원을 들여 성형수술까지 받았다.
현재 연예 관련 기획사는 전국적으로 2,000여개에 달한다. 일부 기획사 홈페이지에는 40여만명이 개인 프로필을 올려 놓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무자격 업체가 태반인 데다 인터넷을 통한 공개 캐스팅 신청이 늘어나면서 피해도 커지고 있다”며 “무심코 올린 자신의 개인 신상이 사기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들은“무자격 기획사들이 부(富)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부당한 요구도 감수하겠다는 연예 지망생들의 심리를 노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최근 교복 모델을 시켜주겠다며 10대 여학생들을 상대로 음란 사진 촬영과 성추행을 일삼다 구속된 김모(30)씨는 경찰 조사에서 “모델이나 연예인을 시켜준다고 하니까 전혀 성추행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연예기획사인 MTM의 황의노 대표는 “연예인의 성공신화만을 보고 자란 청소년들은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받으면‘나도 가능성이 있는가 보다’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정식허가 여부 등 확인 절차를 소홀히 하기 쉽다”고 안타까워했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연예인 신드롬은 사회적 조류임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과열돼 있다”며 “부와 명예 등 화려한 이미지만이 연예인을 규정하는 척도로 인식되는 한 대박 환상을 좇는 피해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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