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때 만든 석가탑을 고려 때 보수하면서 남긴 중수기(重修記)가 관심을 끌고 있다. 아직 중수기 전체가 공개ㆍ판독되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부 기록대로라면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이 다라니경이 11세기에 탑을 보수하면서 새로 넣은 것이라고 한다면,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이라는 영예는 770년께 인쇄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한테로 돌아간다. 세계 최초나 최고(最古)를 유달리 좋아하는 우리 국민 입장에서는 영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 반면 새로 바뀐 고교 국사 교과서에서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기원 전 20~15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바꿔, 종전보다 1,000~500년 앞당긴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흐뭇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아직 학술적 논란이 많은 문제를 다소 성급하게 교과서에 반영한 데에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한 것을 대단한 성과처럼 생각하는 자세가 암암리에 깔려 있다. 역사 문제에서 두드러진 이런 태도는 한국 중국 일본이 특히 유별난 것 같다.
■ 중국은 중국 문명의 기원을 캐는 프로젝트(중화문명탐원공정)를 통해, 신화와 전설에 속하는 3황 5제 시대를 역사에 편입해 중국 역사를 5,000년 전에서 1만 년 전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중국 역사를 처음 본격적으로 정리한 사마천도 '전설의 시대'로 규정한 하은주 이전 시대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우기겠다는 얘기다.
이런 태도는 희대의 코미디를 낳기도 한다. 2003년 5월 일본 고고학계는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다. 후지무라 신이치 전 도호쿠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 중심이 돼, 일본 열도 구석기의 시기를 70만 년 전으로 끌어올린 발굴 유물이 모두 날조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 일본인의 기분에 맞는 발굴만 골라서 하는 바람에 '신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은 후지무라씨는, 일본 열도에도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아예 거짓 증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살았다는 것, 남보다 먼저 뭔가를 해냈다는 것에서 느끼는 자부심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과거의 영화를 자주 들먹이는 사람이 지금은 썩 신통치 않은 경우가 많다. 미국을 대단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역사가 오래됐다거나 세계 최초의 유물이 많아서는 아니지 않은가.
이광일 논설위원 ki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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