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우리나라 30대 기업의 영업이익률이 2년 새 거의 반토막났다는 자료를 보면서 원인과 의미를 따져보던 중 몇 가지를 자문하게 됐다.
대기업이 그렇다면 이른바 '경제의 모세혈관'이라는 중소기업은 어떤 상태일까,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 10년래 주력 업종의 부침으로만 경제의 건강도를 판단하는 것이 정확한 것인가, 사업체수(99.7%)와 고용(87%)에서 절대적 비중을 점하며 생산과 부가가치에서도 50% 가까운 역할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은 어떤 지경에 처했을까, 등이 그것이다.
삼성전자 같은 초일류기업 10개만 있으면 나라를 먹여 살리고 그들이 잘 돼야 중소기업도 살아가는 판에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반문할 법도 하다. 굴지의 그룹 총수들이 앞 다퉈 '샌드위치론'과 '수익성 악화론'을 펼 정도가 되면 모두가 정신차려 경제 살리기에 나서야지, 정권이 나서 '호들갑론'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는 비판은 이미 무성하다.
대기업이 경영환경 악화와 글로벌 경쟁 심화를 극복하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할 수 있도록 정부가 규제완화 등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도 자연스럽다.
● 토끼 등쳐 먹는 공룡 생태계
이 지점에서 큰 의문이 몰려온다. 안팎의 악재에 시달리는 것이 우리 기업뿐이란 말인가. 일본과 중국만 아니라 유럽, 동남아, 나아가 인도와 러시아 등의 대표기업들은 놀면서도 잘 나간다는 말인가.
물적ㆍ인적 자원도 부족한데 정부의 배분정책마저 비효율적이거나 계층적대적이니 옴치고 뛸 여지가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설명으론 안 된다. 잘 나가면 자기 실력이고, 못 나가면 환경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한킴벌리의 문국현 사장이 얼마 전 전ㆍ현직 중진 언론인들의 모임인 '자유칼럼그룹'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것은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정부는 2,000만 명을 고용하는 중소기업을 배려하지 않는다. 온 나라가 대기업을 희망처럼 생각하지만 고용역량은 10년 새 200만 명에서 130만 명으로 줄었다.
대기업의 하도급비리 하나 척결하지 못하는 정부가 어떻게 일본 독일 대만 등과 같은 중소기업 혁신역량을 기대하느냐.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8년 재임시절에 만든 2,500만 개 일자리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인 것을 잘 살펴야 한다."
경기도 성남에 '휴맥스 빌리지'라는 명품 사옥을 가진 변대규 휴맥스 사장은 지난해 10월 한 모임에서 "1970년대 이후 창업한 기업 가운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건강한 생태계는 순환해야 하는데, 대기업의 독과점 구조가 고착화한 한국에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발전할 토양이 척박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안철수연구소로 유명한 안철수씨가 재작년 미국유학을 떠나며 털어놓은 내용은 한층 자극적이다. "대기업이 수조원을 벌어도 중소기업은 그 그늘에서 목숨만 끊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납품업체가 돈을 좀 번다는 소문이 나돌면 당장 대기업 감사반이 들이닥친다. 원자재 비용과 시간당 임금만 따져 납품가격을 산정하는 풍토에선 빌 게이츠가 와도 한국에선 성공할 수 없다."
● '허울' 상생협력은 자가당착
우리나라에서 존경 받는 기업인 명단의 상위를 점하는 이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힘없고 업적도 미미한 중소기업의 곤궁한 사정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처지에서 대기업들이 "먹고 살 수익모델이 없다"고 떠드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일본과 독일 등이 만드는 제품의 기술력과 품질이 대기업에서 나온 것이라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중소기업이 그 원천이고, 가격경쟁력도 거기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좀비(zombie)' 중소기업들이 즐비하다는 글이 최근 외신에 실렸다. "수출챔피언이었던 한국이 길을 잃고 몽유병환자처럼 산다"고 소개된 그 기사에서다. 성장과 고용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 줄 모르는 정부와 기업은 자기 무덤을 파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때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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