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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아프리카 에세이] 가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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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아프리카 에세이] 가나 <2>

입력
2007.03.2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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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승택시를 타고 엘미나 성에 내리자마자 성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소년들 십 수 명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엘미나 축구클럽에 기부를 좀 해 주세요. 유니폼도 사고 공도 사게요. 여기 이 명단을 보시면 지금껏 기부한 외국인들 이름과 기부금 액수가 적혀 있어요.” 아이들은 나를 빙 둘러싸더니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끈질기게 졸라댄다. “일본인이지요? 기부 좀 하세요.” “내 친구가 되어줄래요? 기부 좀 하세요.” “이메일 주소를 알려줄래요? 기부 좀 하세요.”

혼자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성 앞의 대포 위에 올라타고 있는 꼬마들을 발견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들 두 명. 서로 장난을 치며 갈색 고철 위에서 놀고 있었다. 거리는 약 30미터 정도.

완벽한 피사체였다. 사바나에서 아름답고 겁 많은 초식동물을 발견했을 때처럼, 나는 카메라 가방으로 손을 뻗어 소리없이 망원렌즈를 꺼냈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 봐.’

그 애들은 날개를 접은 채 잠시 쉬고 있는 새들 같았다. 곧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렌즈를 바꿔 끼는 내 손은 초조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부딪혀 조개껍질처럼 희게 빛이 바랜 성벽,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엘미나 성을 배경으로 원색의 옷을 걸친 두 명의 어린 생명들.

망원렌즈의 초점이 맞은 순간. 삐, 카메라가 소리를 냈고 나는 얼른 셔터를 누르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소녀들은 멀리 있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린 것처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메라 렌즈 속에서 얼굴을 가린 손가락 틈으로, 그 애들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 애들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 눈에 띄리라는 것을 알고 바로 그 때문에 대포 위에 기어 올라갔던 것이다. 쉽게 얼굴을 보이면 안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얼굴을 보여 봐라.’

영리한 아이들은 여전히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깔깔 웃고, 대포에서 매달리고, 목청껏 노래를 불러댔지만 끈질기게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채였다.

‘얼굴을 보여 달란 말이야.’

한참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눈치를 살피던 두 소녀는 어느 순간 동시에 손을 내렸다. 카메라 렌즈를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는데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내 귀에 방울소리처럼 맑은 환청이 울려 퍼질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속해서 셔터를 누르고, 초점과 노출을 확인하고, 다시 셔터를 눌렀다. 덤불 사이로 보이는 연약한 짐승의 목덜미를 곧장 겨냥한 사수처럼, 모든 신경이 눈동자와 손가락 끝에 집중되었다. 몇 장만 더.

이윽고 대포에서 소녀 한 명이 내려왔다. 푸른 잔디를 밟고 나를 향해 비칠거리며 다가왔다.

“이제.......돈을 주세요.”

소녀는 수줍은 듯 웃었다. 내가 자신들의 사진을 찍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돈을 달라고? 내가 너에게? 왜?”

소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키며 맥없이 중얼거린다.

“......먹을 것 사려고요.”

그 애는 아직 어렸지만 벌써 부끄러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보더니 곧 포기하고 뒤돌아섰다. 다시 깡총거리며 멀리 대포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로 되돌아갔다. 돈을 받지 못할 것을 알게 된 애들은 더 이상 얼굴을 가리는 헛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제 인색한 이방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었다. 더러운 수건을 파란 하늘에 대고 깃발처럼 흔들며 노래하고 있었다. 운이 좋은 날이면 이렇게 대포 위에서 잠깐 기분을 내는 것만으로도 얼마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애들이었다. 운이 나쁜 날이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그러나 일한 자는 먹어야 한다. 나는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멀리 있는 소녀들을 향해 흔들었다.

소녀는 내 신호를 이내 알아들었다. 조그만 얼굴이 기쁨에 넘쳤다. 원하기만 한다면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처럼.

낡아빠진 옷을 걸친 맨발의 여자애는 푸른 풀밭을 박차고 하늘을 날 듯 이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자칫 앞으로 쓰러질 듯 위태롭게.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카메라를 들어올렸다. 소녀의 환한 얼굴, 가냘픈 팔다리, 좁은 가슴을 정조준했다.

‘너희들은 새. 나는 포수.’

엘미나에서 케이프코스트로 돌아오는 합승택시 속에는 케이프코스트 여인 두 명이 타고 있었다. 어시장에서 생선을 사들였는지 비린내가 진동했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여자들은 택시기사를 통해 내 이름을 물어왔다.

“오브루니.” 내가 대답하자 뒷좌석의 여자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 말고, 당신 진짜 이름이 뭔지 궁금하대요.”

“아쿠아(Akua).”

여자들은 더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어쩌면 나는 정말 수요일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수요일이 좋았다. 좋은 날이었다. 고통스러운 월요일과 화요일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 하루가 갈수록 점점 즐거워질 일밖에 남지 않은 일주일의 중간이었다. 오늘이 바로 수요일이다. 내 생일날.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다친 다리의 상처가 아직도 쑤셨고 어깨에 멘 카메라는 쇳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엘미나의 소녀들은 디지털 파일에 갇힌 채 죽지도 썩지도 못하고 박제된 동물처럼 어린 모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방으로 통하는 길고 좁은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누가 후추를 넣고 요리를 하는지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쇠로 된 커다란 열쇠를 방문에 꽂고 이리저리 돌렸지만 손잡이는 너무 낡아 잘 열리지 않았다.

▲ 엘미나 성 (Elmina Castle)

흑인들 한 서린 노예무역 거점

1482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세운 엘미나 성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첫 번째로 건설된 유럽인들의 노예무역 거점이다. 성의 상층부에는 서아프리카의 유럽식 성들이 보통 그러하듯 유럽인들을 위한 호화로운 객실이 위치하고 지하에는 잡혀온 노예들이 감금되는 감옥이 있었다.

한 방에 많은 경우에는 200명까지 수용되어 제대로 눕지도 못할 정도로 좁았으며 위생과 영양상태가 매우 열악하여 말라리아와 황열병이 자주 발생, 노예들 중 상당수가 엘미나 성의 '돌아오지 못하는 문(The Door of No Return)'을 지나 아메리카와 카리브 등지로 팔려가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엘미나 전략 2015'의 일환으로 보수 중이다. 지하 감옥 입구에 걸린 현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죽은 자는 편히 잠들고 돌아온 자는 뿌리를 찾게 하소서. 다시는 이런 불행이 없기를, 살아있는 우리는 맹세합니다.'

케이프코스트(가나)=글ㆍ사진 소설가 박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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