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말 직장 후배의 집에서는 30분 넘게 가정교육이 이어졌다. 맞벌이하는 후배의 아내와 장모는 초등학교 2학년 딸을 앉혀놓고 유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가르쳤다.
“낯선 사람이 붙잡으면 소릴 질러라.” “아빠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연락해 너를 데려오게 하는 일은 절대 없다.” 장모와 아내의‘잔소리’가 딸의 귀에 못 박히도록 반복되더니 후배의 귀를 의심하는 경고가 보태졌다. “경찰 복장을 했더라도 절대 따라가서는 안 된다.”8살 난 아이에게 “믿을 건 너 자신뿐”이라고 가르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그 후배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고 했다.
그 후배뿐이랴. 지난 주 인천 송도에서 초등학교 2학년 박모군이 납치돼 살해된 사건이 터진 이후 등하굣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부모가 부쩍 늘었다.
국가가 내 아이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면 내 스스로 아이를 지켜야겠다고 나선 부모들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8살 아이가 포대에 담겨 차디찬 물 속에 던져졌다는 소식에 절망하는 이 땅의 부모를 향해 경찰이 내놓은 안심책은 <아동 유괴 및 실종 예방가이드> 1만5,000부를 각급 학교에 배포한다는 발표가 고작이었다. 아동>
따지고 보면 송도의 초등학생 살해 사건은 우리의 유괴 대응시스템 부재를 그대로 드러냈다. 경찰이 유괴범의 전화를 감청하고 위치추적 시스템을 가동한 것은 박군 부모에게 5번째 협박 전화가 걸려 왔을 때였다. 일요일이라 제 때 전화국의 협조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휴일엔 유괴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어처구니 없는 해명에 미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보고 들은 일들이 겹쳐졌다. 2004년 5월 어느 날 케이블 방송들이 긴급 뉴스를 내보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10살 소녀가 납치됐다는 소식이었다.
상업방송이 또 한번 요란떠는가 여겼다가‘엠버(AMBER)경고’와 함께 납치 차량과 범인 인상 정보가 시시각각 전달되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쳤다. 방송과 동시에 워싱턴 DC, 버지니아주 등 일대 도로의 전광판에도 엠버 경보가 표시됐다. 1996년 텍사스에서 납치된 뒤 살해된 9살 소녀 엠버 해거먼의 이름을 딴 유괴 대응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었다.
결국 3명의 운전자가 전광판의 엠버 정보를 토대로 범행 차량을 알아보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납치극은 막을 내렸다. 미 법무부가 운영하는 엠버 웹사이트엔 이 제도를 2002년 전국 단위로 확대한 후 230명의 피랍 어린이가 구조된 성공 스토리가 올라와 있다.
미국의 각급 학교에서도 안전교육에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시간과 노력이 투입된다. 학기초 학생들은 거의 2주일동안 정상 수업을 거르고 안전교육을 받는다. 이 때쯤 납치 대응법 등이 담긴 두툼한 가정통신문이 집으로 날아든다. 이미 통보된 부모나 보호자 외에 누구도 학교에서 학생을 데려갈 수 없도록 하는 조치는 기본이다. 유괴를 예방하고 대응하는 데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학교가 따로 없는 것이다.
지금 대선주자마다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열겠다느니, 연7%의 경제성장률을 견인할 것이라는 등 경제 정책을 앞세워 공약하고 있다. 국민을 잘살게 하는 일을 정치의 제일 큰 덕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경찰복장도 믿지 말라고 가르칠 정도로 공권력이 신뢰를 잃은 나라, 부모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어야 안심할 수 있는 나라라면 경제만 앞세운다고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대선 후보가 관심을 쏟아야 할 곳은 경제뿐이 아니다. 납치된 아이를 생매장하는 잔악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자경단(自警團)이라도 만들고 싶은 학부모의 심정을 경제 타령만으로 달랠 수는 없다.
김승일 사회부장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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