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우리 사회를 지배한 것은 생산 제일주의와 민주화 투쟁이었다. 한쪽에서는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높일 것인가를 고민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고난의 투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많이 해결되고 민주화 역시 이전 보다 훨씬 진전됐다.
문화 욕구의 증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단순화하면, 이제 좀 먹고 살만해 졌으니까 즐길 것을 찾고 오락거리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미학은 또 어떤 학문일까.
그 같은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바로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다. 출판 당시(1994년)만 해도 일반인에게 미학은 어렵고 개념 잡기 곤란한 그런 학문이었는데 이 책이 그런 답답함을 꽤 해소한 것이다. 미학>
<미학 오디세이> 에는 미학, 미술, 철학의 역사가 섞여 있다. 가상과 현실속에 원시 시대부터 최근 탈근대적 시선에 이르기까지의 그림, 건축, 조각 등을 중심으로 인류 역사의 모든 시기에 이룬 예술과 아름다움의 본질을 향해 다가간다. 미학>
때로는 한 작품을 파고 들고, 때로는 작품의 분석법을 제시하며, 또 때로는 그 작품을 통해 그 시대 사람의 생각과 삶을 읽는다. 대상이 서양으로 국한된 점이 아쉽지만, 이렇듯 대중을 상대로 미학을 소개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인문서로는 당시만 해도 드물게 구어체 문장을 사용했는데, 독자들은 처음에 그 문장을 불편해 하다가 나중에는 도리어 거기에 매료됐다. 그의 글 쓰기는 특히 인터넷 문장에 익숙한 젊은 독자를 휘어잡았다. 입에 붙는 구어체 문장이기 때문에 죽죽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얕은 책이 아니다.
눈으로만 보고 입으로만 읽는다면 어려울 것 없지만, 틈틈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로 정리할 내용이 많다. 책의 정체는 한 가닥으로만 뭉뚱그려지지 않는, 특이한 내용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진중권은 이에 대해 ‘이중 코드’를 적용했다고 표현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전문가와, 그렇지 못한 일반인을 동시에 겨냥해 책을 썼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 역사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이고, 미학의 영역과 방법론 역시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에서 자칫 혼동이 생길 수 있다”며 “이 책을 통해 미학의 기초 지식을 소개하고 예술을 어떻게 해석, 비평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틀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책을 쓴 현실적 동기는 아주 단순하다.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누나(작곡가 진은숙)가 있는 독일 유학 비용을 마련하기위해서 였다. 범상한 이유지만, 과정은 수월하지 않았다. 시중에 변변한 미학사 책 하나 없었고, 몇 안 되는 개설서는 관점이 낡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지거나, 시야가 좁았다.
자료 부족이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그는 번역된 것을 모조리 찾아서 읽고 빠진 부분은 원전을 구해 보충했으며 필요하면 지방 대학의 석사 논문까지 찾아 읽어갔다. 독일의 누나에게 부탁해 자료를 구했으며 대형 서점의 외국 서적 코너를 훑었다.
노고가 헛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자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미학에 대해 알게 됐다’, ‘미학을 알게 해주어서 고맙다’는 평가가 쌓여갔다. 인문서 치고는 너무 가볍다며 탐탁치 않게 여긴 학계 인사도 있었지만, 반대로 철학자 박이문 교수처럼 “좋은 책 썼다”며 격려하는 선배도 적지 않았다.
출판사를 옮겨가며 책을 냈기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나 판매됐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50만부는 훨씬 넘었다는 게 출판계의 정설이다. 미학이라는 낯선 분야의 책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 과정을 진씨는 “책의 탄생은 조용하여 언론의 주목도, 광고의 지원도 받지 못했지만 책을 먼저 읽은 이들이 주위에 소개를 하고, 입소문을 통해 꽤 많은 이들이 책을 사거나 빌려서 읽었다”고 요약한다. 출판사의 관계자도 “처음에는 그리 각광을 받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독자들의 입 소문을 타고 알려졌다”며 독자에게 고마워했다.
책을 낼 당시 대학원을 졸업한 서른 한 살의 청년 진중권은 이 책을 시작으로 폭 넓은 문필, 저술 활동에 나서 지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논객이 됐다.
진중권은 미학을 단순히 과거의 아름다움을 분석하는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다. 현재 혹은 미래의 현상을 해석하거나 예측하고, 개별 현상에서 보편적 의미를 읽어내는데 정말로 필요한 학문이 미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거리의 간판만 보아도 지금 우리 사회를 해석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잘 알다시?우리나라의 간판은 글자가 많고 또 매우 크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옆에 혹은 위에, 아래에 붙어있는 간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눈에 잘 띌까 간판끼리 치열하게 경쟁한다. “사회적인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경쟁 만능주의를 읽을 수 있지요.”
그가 볼 때 미학은 또 우리 사회의 생산력이다. 과거에는 굴삭기, 기계, 파이프라인, 크레인 등이 생산을 상징했다. 지금은 IT, 나노, 디자인, 브랜드 등이 생산력이다. 육체 노동이 정신 노동으로 대체되고, 눈에 보이는 묵직한 것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으로 생산의 주체가 바뀌었다. 노동의 양태가 변한 지금,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 무엇일까. 진중권은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상상력과는 거리가 멀다. 상상력을 북돋아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그것을 억누른다. 진중권은 “미래를 내다 보지 못하고 과거로만 눈을 돌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보화 사회가 됐는데도 왜 옛날처럼 경제 성장을 하지 못하느냐고 야단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같은 상상력의 부재는 남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지 못하게 하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타인의 시선이 두렵다. 사회적으로도 남과 다른 것을 이해하거나 참아주지 못한다. 현실이 이런데도 사회 지도층은 상상력이 떨어진 우리 사회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고치려고도 않는다.
하지만 사정이 그럴수록 미학에 대한 진중권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미와 예술 그리고 감각의 학문인 미학이 결국에는 사회적 상상력을 돋우고 미래의 생산 동력, 미래의 경제학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 특이하고 실험적인 형식도 눈길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은 대부분 ‘모노포니’(monophony)다. 이런 형식의 음악에서는 멜로디가 중심이 되며 반주는 독립성을 잃은 채 멜로디의 진행을 도울 뿐이다. 하지만 반주가 독립성을 갖고 스스로 또 다른 멜로디 행세를 할 때, 여러 개의 멜로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화음을 만드는 새로운 음악이 된다. 바로 ‘폴리포니’(polyhphony)다.
형식으로 볼 때 <미학오디세이> 는 책의 폴리포니다. 미학사(본문), 철학사(대화), 예술가 모노그래피(에셔, 마그리트, 피라네시)로 내용을 나눠 독립적으로 전개한 뒤 결국에는 서로 만나 화성을 이루게 한 것이다. 미학오디세이>
책에서 미학사 부분을 다룬 것은 본문이다. 그러나 미학이 기본적으로 철학의 한 부분이고, 사유의 틀과 개념을 철학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 같은 철학적 배경을 보여주기 위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등장시켰다. 둘의 대화는 그 형식이 좀 가볍고 장난스러울 때가 있지만 내용은 철학과 예술의 핵심을 짚기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다.
진중권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쓴 제 3권(2003년 발행)에는 디오게네스도 합류한다. 탈근대의 관점으로 볼 때, 철학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주류와 디오게네스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비합리주의적 비주류가 대립하는데 진중권이 이를 잘 활용한 것이다.
책에는 네덜란드의 판화가 에셔(1898~1972), 벨기에의 화가 마그리트(1898~1967), 이탈리아의 건축가 겸 판화가 피라네시(1720~1778)의 작품이 등장한다. 책에서 이들은 단순한 미술가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 현상을 해석하고 창조한 철학자와 같은 인물이다. 이들의 작품은 텍스트의 서술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미학 오디세이> 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같은 특이하고 실험적인 형식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미학>
진중권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미학과 석사
-독일 베를린자유대 수학
-중앙대 겸임 교수, KAIST 초빙 교수
-저서 <춤추는 죽음> <천천히 그림 읽기> <앙겔루스 노부스> <현대 미학 강의> <레퀴엠> <성의 미학> <놀이, 예술 그리고 상상력> 등 놀이,> 성의> 레퀴엠> 현대> 앙겔루스> 천천히> 춤추는>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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