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이 임박한 모양이다. FTA를 걱정하는 것은 협정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협정 체결 후, 정확히 말해 비준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후 빚어질 나라 전체의 혼란상 때문이다.
지난해 한미 FTA가 한창 논란일 때 소위 음모론이 파다했다. 요컨대 노무현 대통령의 FTA 추진은 진짜 체결을 위한 게 아니라, 대선을 앞둔 적정 시점에 결렬을 선언해 반미 감정을 극대화하고 진보진영 중심의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속임수라는 것이다.
이는 타결 가능성이 높아진 최근 상황만 보면 틀린 이야기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음모론의 핵심은 'FTA=대선 변수'라는 점에서 함부로 폐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노무현 정권과 FTA는 낯설지 않다. 2003년 2월 체결된 한ㆍ칠레 FTA가 있었다. 그런데 비준동의안은 그 해 7월 국회에 제출돼 본회의를 통과되기까지 해를 넘겨 7개월이 걸렸다. 해당 상임위인 통외통위에서만 넉 달간 발목이 잡혔고, 본회의에선 세 번의 상정과 표결무산이 반복되는 곡절을 겪었다.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의원들 때문이었다. 농촌출신은 여야를 막론하고 반대했고, 도시 출신도 국회 밖에서 격한 시위를 벌이는 농민단체의 낙선운동 표적이 될 까봐 설설 기었다.
한미FTA가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점, 레임덕에 빠져 있는 노 대통령 등 지금의 조건은 3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하고 불안정하다. 이런 마당에 비준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미 FTA가 미국의 무역촉진권한(TPA) 일정에 따라 3월말 타결, 6월말 체결의 수순을 밟을 경우 동의안은 올 하반기쯤 국회에 제출될 것으로 보인다.
12월 대선까지 이 문제로 나라가 내내 시끄러울 것이라는 계산이 금세 나온다. 단순히 시끄러운 게 아니라 정치권 일부를 포함한 반대진영의 필사적 저항으로 도시와 농촌, 대기업과 영세기업, 부자와 빈자의 전방위적 전선(戰線)이 형성되는 준(準) 내전상태가 될 것이라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분명 여권에게는 지지 층 결집의 기회다. 이런 의도가 있든 없든 여권의 상당수 대선주자와 의원들은 벌써 저지투쟁을 호언하고 있다. FTA반대 투쟁은 노 대통령 비판으로 시작하겠지만, 나중의 칼끝은 찬성파인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을 겨냥하게 돼 있다.
음모론과 비슷한 상황전개다. 다른 게 있다면 협상 결렬 선언이냐, 체결이냐 정도일 것이다.
단, 변수가 있다. 음모론의 주인공인 노 대통령이다. 만약 노 대통령이 국민과 국회 설득에 몸을 던진다면 음모론은 힘이 빠질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에게 이것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노 대통령은 대형 어젠다에 관한 토론과 강의를 즐길 뿐 딴소리 하는 의원들을 직접 만나 달래고 주저앉히는 성가신 일은 좀체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2004년 이라크 파병동의안은 한나라당의 찬성에 기대 겨우 국회를 통과했지만,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 의원들을 불러 협조를 구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게다가 노 대통령은 이제 의원들을 어떻게 할 힘도 없다.
이래저래 음모론이 되 살아날 수 있는 형국이다. 그래도 그런 소리를 듣기 싫다면, 노 대통령이 전력을 다해 나서는 수밖에 없다.
유성식 정치부장 직대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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