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남짓 머무른 단기 방문자로서, 나는 일본에서 아무런 인종주의도 느끼지 못했다. 오사카(大阪)국제공항(이라고 회상하는 건 간사이(關西)국제공항이 1994년에야 완공됐기 때문이다)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리무진 버스를 타기 위해선 미리 표를 사야 했는데, 그걸 몰랐던 나는 무턱대고 버스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처음엔 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가, 내가 그 곳 물정에 어두운 외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현금으로 내도 된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식당이나 술집 종업원들도, 택시기사들도, 거리의 시민들도 하나같이 친절했다. 특히 택시기사들의 친절은, 그 시절 서울 택시기사들의 악명 높은 불친절에 넌더리를 내고 있던 내게, 일본 사람들에 대한 호감을 단박에 심어주었다.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의 도우미 노릇을 하고 있던 도시샤(同志社)대학이나 교토(京都)대학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나는 일본의 그런 첫인상을 거듭 얘기했다.
일본인들에겐 다테마에(建前ㆍ겉으로 드러내는 원칙이나 방편)와 다른 혼네(本音ㆍ본심)가 따로 숨겨져 있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남을 마음 속 깊이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라면 적어도 겉으로나마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큰 미덕이라고. 일반론의 수준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마음 속 깊이 박애주의자가 되는 것은 인류의 지금 진화 단계에선 대부분의 사람에게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박애주의적 행태를 실천하려 애쓰는 것은, 설령 그것이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적극 추천할 만한 일일 것이다.
호텔 내 방에서 밤늦게까지 함께 맥주를 마시던 유학생들은 일본 구경을 처음 한 동포의 이 호들갑에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이내 “여기서 외국인으로 오래 살아보면 생각이 바뀔 거예요”라고 덧붙이곤 했다.
내게 그럴 기회가 주어질 리 없다는 걸 그 때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짧은 일본 방문을 통해 만난 일본인들에게, 나는 일본에 ‘사는’ 외국인이 아니라 일본에 ‘들른’ 외국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스쳐 가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단번에 그걸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일본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못했으니) 말이다. 잠깐 스치는 이방인에게 친절하기는 쉽다. 그러나 함께 사는 이방인에게 늘 친절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게다가, 내가 오직 영어만 썼다는 사실이 내가 만난 일본인들에게서 나를 차별할 의욕을 가시게 했을 수도 있다.(이것은 괜한 짐작이 아니다.
나는 뒷날 파리에 살면서, 서비스업 종사자들이든 공무원들이든 일반 시민들이든 프랑스인들이, 프랑스어로 어설프게 말하는 외국인들에게보다 영어로 어설프게 말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결 더 친절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인했다. 제 나라 말에 대한 집착으로 유명한 프랑스인들에게도, 이제 영어는 존중해야 할 그 무엇이다.) 일상적으로 차별의 눈길을 느꼈을 그 유학생들에게, 일본인들의 박애주의적 노력에 대한 내 찬사는 얼마나 어쭙잖게 들렸을까.
더구나 유학생들만 해도 따지고 보면 일본에 ‘들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상징적 자본을 갖춘 이들이다. 서너 세대 전부터 일본에서 살아온, 그리고 대부분 삶의 조건이 그리 탐스럽지 않은 재일 조선인들과는 처지가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유학생들만 해도, 재일 조선인들에 견주면, 일본인들의 적대감을 피하거나 눅일 조건들을 꽤 지니고 있는 셈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일본에 살아온 동포에게 내가 “일본인들은 참 친절해요. 인종주의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라고 뇌까렸다면 그의 표정이 어땠을까?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박해가 아마 세계 최악의 수준일 한국에서만큼은 아니겠지만, 일본에서도, 유럽이나 북아메리카 출신 백인들을 제외하면, 외국인들이 적잖은 차별에 시달릴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까지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얽힌 역사의 기억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재일 조선인을 지배자의 시각으로 보기에 적절한 환경을 마련해주고 있다. 북한과는 정치 수준에서도 적대 관계가 청산되지 않았다.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가 끝난 다음날, 나는 쓰루하시(鶴嘴) 지역의 한국 시장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닷새 만에 먹어보는 한국 음식은 내 혀를 기쁨으로 채웠지만, 쓰루하시 지역의 허름한 풍경은 쓸쓸한 감상을 자극했다. 확실히, 쓰루하시 지역은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풍경치고는 어딘지 남루해 보였다.
(몇 해 전에 본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 <조?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도 오사카의 그런 허름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영화는 그저 배경으로 오사카를 설정했을 뿐 실제 촬영은 도쿄 근처의 신도시에서 이뤄졌다 한다.) 그래도 쓰루하시의 그 허름함은 생기에 휘감겨 있었다. 조?>
그 생기 덕분에, 나는 그 곳의 허름함이 처음에 불러일으킨 스산하고 서글픈 감상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반도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북조선이라 부르고, 남쪽의 대한민국을 한국이라 부른다. 그리고 남북을 통칭하는 지역 이름으로는 조선이라는 말을 쓴다. 한반도 출신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도 조선인이다.
한국과의 관계가 밀접해지고 이런 저런 일로 일본에 가는 사람들(소위 뉴커머)이 많아지면서, 특히 최근의 한류 열풍에 힘입어, 남쪽 출신 사람들을 한국인이라 부르는 관행이 뿌리내리고는 있다 한다. 그러나 남북 한국인들을 아울러 부를 때는 여전히 조선인이라는 말이 쓰인다.
이와도 관련 있겠으나, 재일동포가 자신을 일컬을 때 쓰는 한국인이라는 말과 조선인이라는 말은 대칭적이지 않다. 자신을 한국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소속감을 그 말로써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그 말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소속감을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말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소속감을 드러낼 수도 있겠으나, 다수는 그 말을 사용함으로써 분단되기 이전의 조선에 대한 소속감, 또는 남북 두 국가에 대한 동시적 소속감을 드러낸다. 그 때의 조선은 한국을 포함한 조선인 것이다.
몇 해 전에 보았던 MBC <100분토론>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무슨 일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손석희씨의 <100분토론>이 서울 여의도가 아니라 일본 오사카의 한국인 거주 지역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재일 문제를 토론한 적이 있다.
늘 합리적 의견으로 고마운 깨달음을 베푸는 릿쿄(立敎)대학의 이종원 교수말고는 패널 가운데 내가 이름으로나마 아는 이가 없었던 터라, 그들의 면면이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들 가운데는 ‘조선인’도 있었고 ‘한국인’도 있었다.
그 패널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스란히 옮겨놓을 수는 없으나, 취지는 이랬다. “나는 대한민국 국적을 지녔다. 그러나 나는 나를 한국인으로 지칭하지 않고 꼭 조선인으로 지칭한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우리를 차별하기 시작했을 때 ‘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했기 때문이다.
그 차별을 부당하게 여기고 이를 고치기 위해 싸우는 사람으로서, 나는 ‘조선인’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었다. 차별의 시작이 조선인에 대한 것이었던 만큼, 차별의 시정도 (‘한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 패널은 차별의 집중적 대상인 조선인에서 벗어나 한국인으로 달아나고 싶지가 않았다. 부정적 뉘앙스가 한국인이라는 말보다 조선인이라는 말에 훨씬 짙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부정적 뉘앙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그로 하여금 조선인이라는 말을 버리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 한 쪽이 써늘했다. 그때부터 나는, 적어도 일본 사람들 앞에서는, 의식적으로 간코쿠진(한국인)이 아니라 조센진(조선인)이 되었다.
그 패널의 말은, 흔히 ‘정치적 올바름’이라 부르는 모든 완곡어 운동이 부분적으로만 정당하다는 사실을 새삼 드러낸다. ‘흑인’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 부른다 해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차별은, 그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 사용 너머에서, 계급관계의 실질적 변화가 이뤄져야만 없어진다.
어떤 흑인운동가들에게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 자체가 역겨울 것이다. 백인들을 ‘유럽계 미국인’이라 부르지 않는데, 왜 흑인들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 불러야 하는가? 흑인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차별은 흑인이라는 이름으로 철폐돼야 하리라.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가 열렸던 오사카국제교류센터와 오사카컴퓨터전문학교 건물에서 나는 남북과 해외에서 온 수많은 조센진 사이에 있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조센진이었다. 쓰루하시의 허름하고 정겨운 조선인 시장통에서 나는 수많은 자이니치(在日) 조센진 사이에 있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자이니치는 아니었으나, 조센진이었다.
그 때, 간코쿠진으로 도피하지 않는 조센진이라는 이름은 자존과 긍지의 이름이다. 부끄러운 것은 조선인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더 나아가, 조선인이기도 한 한국인이 대한민국 국가(國家) 안에서 벌이고 있는 외국인 사냥이다. 한국에서 학대받는 이주 노동자들의 얼굴은 바로 자이니치 조센진의 얼굴이다.
얼마 전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세차게 후려갈김으로써, 우리는 ‘고운 물(麗水)’이라는 아름다운 지명을 야만과 치욕의 이름으로 만들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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