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십니까. 5ㆍ31 지방선거 직후인 지난해 6월14일 바로 이 난에 저는 '지금 이 땅에 필요한 리더십'이란 글을 썼습니다. 차기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지도력 특성과 노선, 자질과 경력에 대해 이렇게 썼더군요.
'개발독재와 그 대칭점의 민주화 운동이 낳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나 강력한 추진력이 아니라 국민 다수와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합리적 지도력, 특정 지역ㆍ계층의 이익 고려나 피해의식과 거리를 두고 사회적 중간층의 의사를 존중할 줄 아는 중도 노선, 안정 성장으로 실질적 삶의 향상을 가져올 실용주의적 개혁 노선 등이다.
● 사람을 잘못 보았다
아울러 지도자 개인의 정서적 불안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으로 보아 평균적 성장과정을 거치며 교양과 정서적 안정을 갖추었을 것도 요구된다. 한편으로 민주화 세력의 독점적 정당성은 퇴색했지만 아직 군사독재의 서슬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그 때 어디에 있었느냐는 잣대는 여전한 상대적 힘을 갖는다.
현재 거론되는 예비후보 가운데 이런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손학규 경기도 지사다. 그러나 낮은 지지율로 보아 유권자가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는 한 그는 본선 출발선에도 서기 어렵다. 그것이 우리가 떠안을 불행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20년 넘게 신문사 밥을 먹었다는 놈이 특정인 지지를 선언하는 듯한 글을 썼으니 약간의 놀림은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림조차 저는 기뻤습니다. 손 전 지사께서 얻으신 객관적 평가가 워낙 확고해서 특별히 정치적 오해를 살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더디고 희미하긴 했지만 지지율이 오르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탈당 선언을 듣고 난 지금 그런 모든 기쁨이 꺼져갑니다. 그 대신에 제 주변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망과 함께 사람을 또 잘못 보았다는 주관적 자책이 밀려듭니다.
애초에 저는 지사께서 이번 대선에 모든 꿈을 걸었다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정치 현실은 자질과 비전에 대한 평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지사님은 '민생 대장정' 등을 통해 현장에서 충분히 확인하셨을 민심까지 외면할 정도로 현실 감각을 결여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뚜렷이 오르지 않고, 외부의 유혹도 잇따르는 가운데 부단히 경선 규칙 개정을 요구하고, 승리를 다짐하는 모습에서 다른 정치 목표가 섰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좁히자, 경선 포기나 탈당 등 민주화 이후 싹트기 시작한 한국정치의 고질병을 치유할 기초를 다지자는 생각인 줄 알았는데 엉뚱한 짐작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 또한 잠시 지사님이 감추었던 이상론에 감염됐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사님의 탈당이 안은 정치윤리의 문제나 말 뒤집기 작태, 무조건적 목표지향성 등을 질타했습니다. 제 생각도 다르지 않기에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늘 마음 한 구석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가 이번 탈당 선언을 보면서 내용이 확연해진 단점 하나를 전하겠습니다. 여전히 이른바 '중도세력'의 후보로서, 또는 범여권 연합세력의 후보로서 대선에 임하시려는 생각이라면 꼭 새겨 들으십시오.
● 비장함 벗어 던져야
과대망상이나 시대착오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너무 거창하고 비장합니다. 세상이 다 아는 이유의 탈당 선언을 굳이 백범 김구 선생 앞에서 한 것이나 당장 일상의 삶이 걱정인 국민 앞에서 한반도의 명운을 거론한 것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언제까지 민족독립운동이어야 합니까. 안 그래도 대중적 이미지가 약한 분이 과장되게 큰 걸음을 걸어 보이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훨씬 가볍고 작은 몸짓과 걸음으로 사뿐사뿐 가십시오. 정치환경의 변화 속에서 '중도세력'이 더듬어야 할 '시중(時中)'도 그래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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