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게 되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300>과 존 큐런 감독의 <페인티드 베일> 이 바로 그것이다. 두 영화 모두 화제를 모은 작품들답게 강력한 시각적ㆍ서사적 흡인력을 갖춘 수작이었다. 페인티드>
그러나 각기 만화와 소설을 저본으로 삼은 두 영화가 주는 질감은 상당히 다른 편이었다. 어찌 보면 이 두 영화는 현재 혼돈 상태에 처한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두 가지 정반대되는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듯한 면도 없지 않았다.
● 시각적 흡인력 있는 작품이지만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영상에 옮긴 <300>은 시종일관 관객의 눈에 광선총을 쏘아대는 듯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스파르타군 300명이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좁은 협곡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는 과정이 반복해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역사에서 소재를 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역사성을 증발시켜버린 작품이다.
대신 관객의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영상들이 거의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밀어닥친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과거의 사실을 다룬 역사물이라기보다는 시공간이 먼 미래의 우주 공간 어디라도 상관없는, 또 한편의 '스타워즈' 즉 판타지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피가 튀고 잘려나간 팔다리가 난무하는 스크린은 오직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서 존재할 뿐, 잠시라도 음미하거나 성찰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한 채 영화는 일직선으로 종점을 향해 내닫는다.
이에 비하면 <페인티드 베일> 은 정적이라 여겨질 정도로 차분하게 서사적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영화였다. 원작자 서머셋 몸은 무엇보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었고, 그 덕분에 대중작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페인티드>
이 작품에서도 중국이라는 이국적 풍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남녀의 사랑과, 배신과 죽음의 여정이 짜임새 있게 그려져 있다. 1920년대 한 영국 처녀가 중국에서 세균 연구를 하는 남성의 청혼을 받아 결혼하고 상하이로 건너온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그녀는 다른 남자와 불륜에 빠지고, 이를 알아차린 남편은 콜레라가 창궐하는 오지로 함께 떠날 것을 종용한다.
그림엽서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중국 내륙의 아름다운 산하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중국의 당대 상황이 중첩되고, 동양인과 서양인이 서로 경계하다 조금씩 이해하고 적응해나가는 과정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300>이 컴퓨터그래픽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인공적 자극으로 가득찬 영화라면, <페인티드 베일> 은 실물을 배경으로 한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인 영화였다. 페인티드>
전자가 만화의 과장법과 돌출적인 장면 제시를 내세운 작품이라면, 후자는 시대, 인물 성격, 사건의 개연성 같은 문학적 요소의 영화적 구현에 공을 들인 작품이었다. 물론 이를 단순히 대담한 실험적인 성격의 작품과 익숙하고 전통적인 문예영화로 구분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일이 될 것이다.
● 할리우드식 영화의 한계 보여
오히려 이들 영화는 모두 할리우드식 영화 만들기가 어떤 한계에 봉착했으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 다양한 시각적 자극의 창출과 재래적 서사의 차용에 분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 영화가 상업영화로서 일정한 개성과 완성도를 구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 난 후 한편으로 뻔하고 다른 한편으로 공허하다는 느낌을 안겨주는 것은 그 때문인 듯하다.
영화보기에서 기분전환 이상의 그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영화보기는 공허한 시간을 잠시 잊기 위해 빠져드는 시각적 주전부리 이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남진우 시인,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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