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할인 쿠폰을 여러 사람들이 모아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 주면 어떨까요.”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국민재단’기획실장 이영수(38)씨는 최근 교회 벼룩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고르다 동네 중국음식점에서 준‘10회 이용시 1회 무료’할인 쿠폰 1장을 발견했다.
아이들 장난감도 벼룩시장에서 구할 정도로 검소한 그에게 순간‘쿠폰 나눔’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책상 서랍이며 주방 찬장 등을 뒤져 보니 2,3장씩 모으다 만 치킨, 피자, 족발 등 할인쿠폰 수십 장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처박혀 있었다.
“다른 집도 그럴까, 잠자는 할인 쿠폰은 얼마나 될까.”한 번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그날 저녁 동네 후배 집들이에 모일 이웃들에게 전화를 걸어 “A피자 가게 할인 쿠폰을 집에서 찾아 합쳐보자”고 제안했다. 이씨 등 네 가족이 쏟아낸 피자 쿠폰은 20장이 넘었다. 대형 피자 2판을 공짜로 시키고 과일 등을 곁들이니 훌륭한 잔칫상이 마련됐다. “할인 쿠폰을 모아 4만원이나 절약했는데 왜 진작 생각을 못했는지…. 보물찾기라도 한 기분이었습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이씨는‘쿠폰 나눔’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득 한 홈쇼핑 업체에서 고객이 포인트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선물을 주는 이벤트가 떠올랐다. “그때 포도 한 상자를 받았어요. 평소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거나 너무 적어 묵혀두던 포인트를 기부해 큰 기쁨을 누린 것이지요.” 이씨는 “그래, 이거야!”하고 무릎을 쳤다.
할인 쿠폰은 음식은 물론 미용실 등 서비스업까지 쓰임새가 많기 때문에 모으고 나누는 시스템만 제대로 갖추면, 음식물 나눔 운동인 ‘푸드뱅크’만큼이나 사회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장 동료, 사회복지사, 집 주변 학교 교사들도 ‘쿠폰 나눔’제안에 큰 호응을 보냈다고 한다. “예전에 폐품이나 빈병을 활용했던 것처럼 가정에서 잠자는 쿠폰을 학교에서 모아 불우이웃을 위해 쓴다면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런 봉사활동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당장 저부터 쿠폰 모으기에 힘쓸 작정입니다.” 이씨는 19일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에 ‘잠자는 쿠폰을 깨워라’ 아이디어를 냈다.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
■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만 있으면 쉬워요
쿠폰만 제대로 챙기면 피자와 양념통닭이 생긴다. 미용실도 공짜로 간다. 피자는 부모 잃은 아이들에게, 양념통닭은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값진 선물이 될 수 있다. 미용실 이용권은 외롭게 살아가는 할머니들에게 유용하다.
이영수씨가 제안한‘쿠폰 나눔’운동은 번거롭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작은 정성만 있다면 버려지는 종이 한 장에 따뜻한 사랑을 불어넣을 수 있다. 실제 한국일보와 희망제작사가 알아 본 결과, 우리 사회 한 켠에선 이미 ‘잠자는 쿠폰’을 깨워 보육원이나 양로원에서 보람 있게 쓰자는 시민들의 자생적 움직임이 싹 트고 있다.
부산 사하구의 ‘쿠폰 나눔’현장에 가 봤습니다
“하얀 봉투 속에 곱게 들어 있는 몇 장의 쿠폰을 보면 절로 힘이 난다.”부산 사하구에선 지난해 12월 국내 첫 ‘쿠폰 나눔’바람이 불었다. 제안자는 지역 정보사이트 ‘사하구넷’(http://sahagu.net)을 운영하는 문준호(32) 대표다.
동료들과 “쿠폰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 의기투합한 그는 사이트에 ‘쿠폰을 모으자’는 배너를 띄우고 지역 사회단체 등에 동참을 호소했다. 12월 31일까지 282장을 모았지만 종류가 너무 다양해 피자 7판, 통닭 2마리 밖에 바꿀 수 없었다.
문씨와 동료들은 주머니를 털어 보탠 돈으로 피자 10판, 통닭 5마리를 사 들고 그날 저녁 사하구 감천동의 어린이 보호시설‘애육원’을 찾았다. 문씨 뜻에 공감한 동네 중국음식점 사장님도 함께 해 따뜻하고 푸짐한 식탁을 차려 근사한 송년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문씨는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이 너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쿠폰 나눔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3개월이 지나면서 호응은 점점 뜨거워졌다. 대전에서도 쿠폰이 전달되는 등 한 달에 400장쯤 모인다. 지역 사회도 동참한다. 구내 중학교 2곳과 초등학교 2곳이 쿠폰 모음행사를 열기로 했고, 사하구청도 동사무소에 쿠폰 모음함을 마련키로 했다.
쿠폰 나눔 이래서 필요합니다
쿠폰의 대표는 역시 음식 쿠폰이다. 중대형 프랜차이즈 업체와 동네 식당, 제과점 등에서 주는 쿠폰을 모아 기부하면 누구를 얼마나 도울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세끼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60만 명을 훌쩍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끼니를 거르는 학생은 약 17만 명에 달하고, 미취학 아동 12만 명도 배를 곯고 있다.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노숙인이나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등 취약 계층을 합치면 배고픈 이웃은 우리 주위에 흔하다.
하지만 ‘푸드뱅크’등 기존의 먹거리 나눔 운동은 음식물 직접 기부로 인한 관리의 어려움 등으로 갈수록 빛이 바래고 있다. 푸드뱅크는 전국 400여 지점에서 한해 평균 130만 명이 이용하지만 최근 3년간 40%나 기탁 음식이 격감했다.
희망제작소와 한국일보는 이에 따라 우선 음식 쿠폰 나눔을 중심으로 한 캠페인을 구상하고 있다.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학교, 프랜차이즈 업체, 식당, 복지단체를 연결해 쿠폰을 모으고 나누는 시스템을 만들 계획이다. 행정자치부와 함께 서울 각 구청 사회복지과에 공식 정책제안도 할 예정이다.
희망제작소 김이혜연 연구원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며 “쿠폰을 통해 음식물을 나누는 것은 마음과 정성, 생명의 나눔”이라고 말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부산=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 눈만 돌리면 자투리 기부거리 '수두룩'
주변을 둘러보면 무심코 버리는 대신 ‘십시일반’ 모아 기부에 쓸 수 있는 물건이 쿠폰 뿐은 아니다. 희망제작소와 한국일보에 모인 갖가지 시민의 제안들은 남을 돕는 건 작은 정성과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쇼핑백ㆍ종이컵으로 기부금을
백화점과 서점 등은 쇼핑백을 반환하면 100원 안팎의 돈을 주는 경우가 많다. 희망제작소에는 최근 “백화점, 아파트 단지 등에 쇼핑백 공동수거함을 설치해 작은 나눔을 습관화하자”는 아이디어가 올라왔다. 이웃끼리 나눠 쓰거나 환불금으로 이웃돕기에 활용하자는 것이다. 주부 이미경(43ㆍ여)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파트 폐지 수거함에 쇼핑백들이 그대로 버려진 것을 본 이씨는 쇼핑백을 모으기로 마음 먹었다. 2005년 7월부터 6개월간 이씨는 무려 6,000개가 넘는 쇼핑백을 모았다. 환불받은 60여만원은 사랑의 전화 복지재단에 고스란히 기부됐다.
커피전문점의 종이컵도 훌륭한 기부 수단이다. 일부 업체를 중심으로 반환시 50원씩 환불해 주고 있다. 회사원 김모(36)씨는 “길거리에서 들고 다니며 마시다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곤 한다”며 “사무실 동료들과 종이컵 환불금을 모아 이웃을 돕기로 하고, 사내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카드포인트나 영수증으로 사랑을
이용 실적에 따라 적립되는 각종 카드 포인트도 사용되지 않은 채 유효 기간이 지나 소멸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부분 카드사가 홈페이지 등에서 고객의 소액 포인트를 기부받아 복지시설 등을 돕고 있지만 아직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A카드 사용자는 조금만 신경 쓰면 저소득층 어린이 심장병 수술비를 지원할 수 있고, B카드 이용자는 백혈병이나 소아암을 앓는 어린이와 결식 아동을 도울 수 있다. A카드 관계자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기부 의사만 밝히면 액수가 크지 않더라도 작은 정성으로 이웃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대형 할인마트는 사회복지단체나 학교 어머니회 등 공공성을 지닌 지역단체에서 마트 이용 영수증을 모아오면 쓴 돈의 0.5%를 분기별로 돌려주고 있다.
김정우 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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