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틀리는 법이 없다. 새벽 5시55분. 백산OPC 이범형(72) 사장의 출근 시간이다. 시계는 틀려도 이 사장은 틀리지 않는다.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꼭 이 사장을 두고 하는 얘기인 것 같다.
회사 꾸리기가 힘에 부치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이 사장은 손사래를 친다. “무슨 말씀. 이제 시작이예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사장이 지휘하고 있는 백산OPC는 프린터의 핵심 부품인 드럼(Drum)을 생산하는 전문업체다. 부품 회사라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산OPC는 세계 흑백 드럼 시장에서 25%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명실공히 이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자다.
드럼 기술의 본거지이며 가격과 품질이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에서조차 시장 진출 2년 반 만에 가격을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가격은 물론 품질과 서비스에서도 탁월한 경쟁력을 앞세워 독일, 대만 등 쟁쟁한 국가들의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지금도 점유율 1위(65%)를 고수하고 있다.
백산OPC가 이처럼 빠른 시간 내에 세계 선두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동종업체 보다 한발 앞선 기술력이 보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백산OPC는 3년 여에 걸친 시행착오를 통해 알루미늄 튜브의 가공 및 표면처리 기술, 고팅액 혼합제조기술, 코팅처리 기술 등 드럼생산에 필요한 전체 공정기술을 확보했다.
특히, 원가절감 개선 노력을 꾸준하게 전개한 결과, 알루미늄 튜브의 전체 가공 공정 및 기술을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유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원가를 5~10% 가량 절감함으로써 동종업체들과의 가격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알루미늄 소관을 재생하는 기술도 백산OPC만이 보유하고 있다. 지난 2001년 독자 개발에 성공한 이 기술 덕분에 백산OPC는 매년 약 25%에 해당되는 재료비를 절감하고 있다.
백산OPC는 제품 기술력 뿐 아니라 판매방식도 혁신적이다. ‘한프(hanp)’라는 자가브랜드로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고객에게 직접 판매하는 방식을 채택, 중간유통마진을 줄인 만큼 고가정책을 유지함으로써 ‘매출과 영업이익 확대’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이 사장은 “직거래를 통해 고객들의 요구와 불만 사항들을 직접 처리함으로써 고객만족도가 크게 향상됐다”며 “소비자들로부터 주문과 품질 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경우, 24시간 안에 답신을 통보해 고객들과의 신뢰도 향상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백산OPC는 이를 위해 미국(애틀란타)과 유럽(런던) 지역에 지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 등 지사가 없는 지역에는 본사에서 직접 현지에 운영창고를 두고 비즈니스를 진행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은 백산OPC의 위상을 180도로 변화시켰다. 해외시장 진출 초기, 이 사장은 제품을 들고 거래처를 방문했을 때 문전박대의 설움을 수없이 당했다. 그러나 이제는 제품구매를 위해 찾아오는 해외 바이어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이 사장은 “하루 일과 중에 해외 바이어들과의 상담을 조정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 돼버렸다”며 “요즘 들어 격세지감을 많이 느낀다”고 말한다.
지난 2003년 476억원에 달했던 매출 실적도 2006년에는 528억원으로 올라섰다. 그 사이에 종업원 수도 198명에서 300명으로 늘었다. 생산량의 95%를 수출하고 있는 백산OPC는 현재 전세계 70개 나라의 400개 업체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세계 흑백 프린터 드럼 시장을 평정한 백산OPC는 창업 12년째를 맞아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백산OPC가 정한 신성장동력은 컬러 프린터에 사용되는‘컬러 드럼’제품. 컬러 드럼은 흑백 드럼 제품과 비교해 크기는 똑 같지만, 제품 가격에서 2배 가까이 높은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지난해부터 컬러 드럼 제품 시장진입 준비에 착수한 백산OPC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40만개를 한 번에 작업할 수 있는 코팅 설비도 갖췄다. 컬러 드럼 제품의 생산 비중도 올해는 10%까지 확대할 예정이며, 내년에는 20%까지 높일 방침이다. 올 매출 목표도 전년에 비해 12% 늘어난 592억원으로 늘려 잡았다.
이 사장은 “21세기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컬러 드럼 시장에서 결판날 것”이라며 “고부가가치 시장인 컬러 드럼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켜, 오는 2010년에는 반드시 ‘1000억 매출 클럽’에 가입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진천=허재경 기자 ricky@hk.co.kr
■ 이범형 사장의 별난 직원 사랑
백산OPC 이범형 사장의 사원 사랑은 각별하다. 환갑이 지난 나이(62)에 회사 간판을 내걸다 보니 백산OPC에 근무하는 종업원(평균 32세) 대부분이 이 사장의 자녀들과 비슷한 또래다. 그래서인지 이 사장이 종업원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사뭇 다르다.
이 사장은 관공서나 일반 대학 등의 요청에 따라 하는 사외 강의의 강사료도 사원들을 위해 사용하는 사원복지통장에 바로 입금한다. 쉽지 않은 일을 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이 사장은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회사에서 고생하는 사원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했다”며 겸손해 했다.
이 사장은 자신이 꾸준히 하고 있는 외국어 공부도 공유하기 위해 사원들에게 직접 외국서적까지 사주면서 독려해오고 있다. 사원들도 스스로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서 외국어 공부는 필수”라며 “회사를 위해서나 개개인들의 역량을 높이는데도 유익한 일”이라고 말했다.
주인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회사경영에 전원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도 이 사장의 몫이다. 종업원들이 현장 근무를 하며 개선됐으면 하는 사안을 정리해서 프로젝트로 제시하면, 회사에서는 이를 검토한 뒤 경영에 반영한다. 물론 프로젝트를 통해 얻어진 성과의 일부(수익의 5%)는 프로젝트 제안자에게 돌아간다.
이 사장은 “지난 한해 동안 직원들이 낸 프로젝트 덕에 20억원 가량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총무부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순호 과장은 “다른 회사와는 다르게 백산OPC 직원들은 내부적인 업무에서나 외부적인 활동에서도 자발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회사 분위기를 전했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사장. 그는“은퇴는 아직까지 제 인생 로드맵에 잡혀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허재경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