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다 갑자기 뒤가 마려워, 들고 있던 시집을 뜯어 일을 본 적이 있는지. 시인은 먼저 시를 정성껏 읽은 뒤 구기고 구겨 부드럽게 만든 다음 일을 매듭 짓는다.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 결이 부들부들해 진’ 종이가 그제서야 ‘아, 부드럽게 읽힌다’고 고영민(39) 시인은 신작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에서 읊는다. 기상(奇想)이 시상(詩想)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똥구멍으로>
이 시대의 시는 무엇인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젊은 시인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은 어디를 겨누는가. 그것들은 하나의 의미 군(群)이 돼 우리 시대를 응시하고 있다. 실천문학사가 <21세기 우리 시의 미래>란 이름으로 답했다. 1998년 이후 등단해 한 권 이상의 시집을 낸 시인 중 선정된 49명의 대표작을 각각 2건씩 추출한 결과다.
‘아이는 잘 크냐 / 내 걱정은 마라’. 바닷가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노부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도시의 아들 집까지 와서 ‘휴일 아침 / 만조보다 깊은 적막’을 깬다. ‘가난한 기도(祈禱)처럼 창 밖에만 서성이는 아버지’의 존재를 문득 느낀 나는 ‘타들어가듯 애써 남은 잠을 구한다’. 어쩌다 걸려 온 아버지의 전화는 샐러리맨이 된 아들의 아침잠에 훼방꾼일 뿐이다. (김병호, <휴일 아침 – 부재의 위안> ) 휴일>
팝 문화에 대한 감성은 그들의 일상이다. ‘재니스 조플린(요절한 록 가수)의 머리카락 같은 /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문혜진, <질 나쁜 연애> ) 때로 그들은 도발적이다. 질>
‘도대체 길을 잘못 든 나는, 손톱을 세워 나무를 휘감는다 한 움큼의 털을 강박적으로 비벼댄다 메시지 온다’. 시인은 그것이 ‘고립을 즐기라고 스스로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누구나 갖고 있는 핸드폰이 말하는 명령어임을 안다. (김이듬, <지금은 자위 중이라 통화할 수 없습니다> ) 지금은>
그럼에도 이들의 시는 지금 한국인들이 본원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밝혀주고 만다. ‘궁따 궁따, 설장구 치는 장구잽이에 / 시집 못 간 처녀 애간장이 녹고’(박성우, <필봉 굿판> ) 감성적 도발의 대극, 신경림 시인의 <농무> 가 자아내는 정서는 여전히 유효함이 확인된다. 농무> 필봉>
사이버 시대이지만, 이들 젊은 시인에게는 세상살이의 구체성이 갖는 존재감이 중요하다. ‘뻘밭을 모르고 깊은 바다를 말할 수 없’는 삶의 이치를 이들의 직관은 감지하고 있다.(이종수, <벌교> ) 벌교>
이 책은 이재무 이인 손택수 등 시인 3명, 유성호 엄경희 등 평론가 2명 등으로 이뤄진 선정위원회의 논의 끝에 빛을 보게 됐다. 위원회 측은 ▦서정적 발화법 ▦신선한 발견과 표현 ▦새로운 언어와 발상 ▦삶의 구체성 ▦다양한 상황의 시적 재현 등 다섯 가지 기준을 갖고 선정한 결과라고 밝혔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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