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짧은 경제통계 수치만 담아 1보, 2보 식의 제목을 붙인 경제기사 속보를 자주 접한다. 통신사와 인터넷 매체들은 경쟁에 뒤질세라 수치 하나하나를 쪼개 급히 작성한 기사를 쏟아낸다. 정부가 발표하는 경제통계 수치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통계 수치가 그 정도인데, 하물며 경제 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좌우하는 경제 부처 수장의 발언이 갖는 무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장은 경제 수장의 입을 통해 경제 상황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앞으로 내놓을 정책 등을 예상하며 기민하게 움직인다. 경제 수장의 레토릭이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골라 사용할 정도로 정교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강남권 거주자가) 분당으로 이사가면 같은 평수를 사고도 상당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발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권 부총리의 언급은 양도소득세 완화나 종합부동산세 경감 주장에 대한 반박 차원에서 나온 비유로 해석된다. 하지만 선의의 1주택자, 뾰족한 수입이 없는 고령자들의 입장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 우를 범했다.
수백, 수천 만원의 세금을 더 내게 된 그들을 다독이진 못할 망정 '세금 낼 능력이 안되면 다른 동네로 떠나라'는 말로 부아만 더 돋우고 말았다. 이쯤 되면 경제 부총리의 레토릭 치곤 0점에 가깝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그의 발언이 지난달 27일 인터넷신문협회 주최 토론회에서 "비싼 곳에서 살겠다니까 문제지, 싼 곳으로 이사 가면 양도세를 내고도 돈이 한참 남는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판박이라는 점이다.
노 대통령이야 독특한 화법으로 유명하니 그렇다 해도 전문 경제 관료인 권 부총리가 부적절한 비유를 모방한 것은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려는 지나친 정치적 행동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어디 권 부총리 뿐인가. 참여정부의 경제 부총리들은 부동산 정책에 관한 한 노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인식을 좇는 발언으로 자주 논란을 일으켰다.
김진표 전 부총리는 "판교 신도시에 1만평 규모의 학원단지를 건설해 강남 집값을 잡겠다" "강북에 특목고를 만들어 강남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는 등 교육정책으로 강남 집값을 잡으려는 외골수 같은 언행으로 망신만 당했다. 한덕수 전 부총리는 2005년 8ㆍ31대책 발표 당시 "부동산 투기는 끝났다.
집값을 2년 전으로 되돌릴 것이다"고 공언했지만 집값은 더 오르고 말았다. 정책 시행 전에 정책의 효과부터 호언장담하는 그들의 레토릭에 정책은 시장의 웃음거리가 돼버렸다.
권 부총리는 분양원가 공개, 분양가 상한제, 반값 아파트 등을 반대했다가 "분양원가 공개는 시대적 흐름"이라는 노 대통령의 인식과 정치권 요구에 밀려 입장을 바꾸는 바람에 신뢰를 잃었다.
경제 수장들의 정권 코드 맞추기식 레토릭이 이어지는 동안 한국 경제는 미래 성장동력을 잃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로 추락하고 있다.
적어도 경제 수장의 레토릭이라면 '코드 맞춤형'이 아니라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치밀하게 계획되고 절제된, 그래서 시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초정밀 유도탄'형이어야 하지 않을까.
황상진 경제부장 직대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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