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주먹 꽤나 쓰던 사내가 있었다. 경북 영주공고 재학 시절엔 폭력서클을 만들어 영주 바닥을 ‘망나니처럼’ 휘젓고 다녔다. 학교보다 경찰서를 더 자주 드나들었다. 부모도 교사도 말리지 못해 ‘문제아’로 악명 높던 이 청년은 지금 종업원 40명에 연 매출 40억원을 올리는 중소기업의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도금처리업체 기양금속공업㈜ 배명직(46) 사장의 ‘무용담’이다. 배 사장은 19일 도금 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주관하는 ‘이 달의 기능한국인’에 선정됐다. 그는 “학창 시절에 원 없이 싸우고 놀아 봤기에 사회에서 일도 그만큼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고교를 간신히 졸업한 문제아는 2년간 대구에서 못과 안경테, 낚싯대 만드는 공장들을 전전했다. 그는 1979년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무일푼으로 서울행 야간열차를 탔다. 첫 1년은 무급으로 일한다는 조건으로 한 도금업체에 들어가면서 도금과 연을 맺었다.
월급 없이 지낸 첫 1년은 “죽지 않은 게 다행인 시기”였다. 당시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의 보금자리는 공장의 폐수처리장 구석이었다. 온갖 독성 화학물질이 넘치는 곳에서 라면 박스 몇 장을 바닥에 깔고 먹고 잤다. 아침이면 박스 안은 안개가 낀 것처럼 독가스로 자욱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아침에 일어나다 어지럼증으로 쓰러졌다.
배 사장은 “집에서 부쳐온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며 라면만 먹어도 감사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며 “다행히 1년 뒤부터 월급 25만원이 나와 공장 인근의 허름한 여인숙으로 옮겨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공장 일을 하면서 “독가스보다 더 독하게” 도금 기술과 이론을 공부했다. 85년에는 인생 최대의 모험을 했다. 전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지금의 회사를 차렸다. 불과 24세 때의 일이다. 그는 “남 밑에서 일 하는 걸 못 참는 성격이라 사장이 되고 싶어 회사를 세웠다”며 허허 웃었다.
배 사장의 열정과 끊임없는 기술 개발로 회사는 지금 공장 2개를 가진 튼실한 기업으로 컸다. 2001년 도금 분야 최고의 자격증인 기능장이 된 그는 꾸준한 기술 혁신으로 도금 관련 특허를 6개나 따냈다. 지난해엔 인체에 해로운 크롬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적 도금 기술을 개발했다. 국내 최초로 돌 도금에도 성공했다.
도금 인생 20여년. 배 사장은 ‘수완 좋은 경영인’보다는 ‘훌륭한 기능인’으로 불리길 바란다. 그는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산업기술대 신소재공학과와 경기공업대 청정환경시스템공학과 겸임교수도 맡고 있다.
배 사장은 “도금은 숟가락부터 컴퓨터 제조까지 없어서는 안 될 첨단 기초핵심 분야인데, 열악한 작업환경 탓에 3D업종으로 천대 받고 있어 안타깝다”며 “도금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는 ‘표면처리연구센터’를 건립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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