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하 핵실험을 단행한 지난해 10월 서울. 민간조사(Private Investigators: 이하 PI) 업체인 힐 앤 아소시에이츠(Hill and Associates: H&A) 요원들은 한 외국기업 직원들을 상대로 1시간 가량 한반도 탈출계획을 점검했다.
위기징후단계 (Trigger Point)가 되면 확보한 비행기편으로 곧바로 출국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서울 성북동의 안가로 모인다는 계획을 주지시키고 가족은 물론 애완견 명단까지 확인했다.
PI는 과거에 사설탐정으로 불리던 업종. 요즘의 다국적 PI기업은 조사 뿐 아니라, 고객에게 경비 경호 보안서비스를 함께 제공한다. 홍콩왕립경찰 최연소 대테러부대장 출신 CEO가 창립했고, 미국 연방수사국(FBI)와 CIA(중앙정보국) 출신 간부들이 참여한 H&A는 16개국에 400여명의 요원을 두고 있다.
한국지사장 전승훈씨는 “극동공략을 위해 1999년 일본에 이어 2004년 한국에 4명의 직원을 둔 지사가 개설됐다”면서 “정보와 보안 경호가 모두 맞물린 서비스가 한국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H&A는 종합 보안서비스(Total Security Service)로 무장한 채 우리나라에 진출한 여러 다국적 PI 기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미국 등에 기반을 둔 대형 또는 중소형 PI기업들이 한국에 지사를 개설하거나 하청계약을 맺는 형태로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올해 안에 국회에 계류 중인 민간조사업법이 통과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PI활동이 합법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 또한 법률시장 개방으로 외국 로펌의 진출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이들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세계최대의 PI네트워크 조직인 세계탐정협회(WAD)의 그렉 스캇 부회장은 “한국의 PI합법화는 자격 요건을 갖추지 않는 PI 들의 활동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이라면서 “잘 훈련되고 교육 받은 프로들에겐 큰 기회가 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기업들은 기업 조사단을 보낸 뒤, PI들에게 조사를 다시 한 번 의뢰한다”면서 “오래 공을 들인 투자유치가 우리 보고서로 무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분야의 거인인 미국의 크롤(KROLL)사도 한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 전세계에 3,700명의 요원을 두고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고, 브라질에선 룰라 대통령에게 보낸 핵심 측근의 이 메일까지 입수한 사실이 드러난 회사다. 르네 윤 한국지사장은 “우리는 이제 실정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 회사의 하청을 맡은 PI업체의 A씨는 “월가에선 크롤의 보고서 없이 새 사업을 하지 않고, 필리핀 정부도 고객”이라면서 “본격 진출하면 대항할 업체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웨덴 다국적 기업 시큐리타스(Securitas)가 인수한 핀커튼(Pinkerton)사도 한국 재진출을 위해 PI스카우트에 나서고 있다.
현재 한국에 상주 주재원을 두고 활약하고 있는 외국 PI업체는 10여 개사 300여명 수준. 손해보험협회 안병재 상무는 “탐정 활동이 합법화되면 기업정보조사를 포함한 시장 규모가 3조원은 넘을 전망”이라면서 “치고 빠지기 식 업무를 해온 외국 업체들의 공세가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합법화 이후의 사업 전망 등으로 마냥 들떠 있던 국내업계에서도 경계론이 늘고 있다. 조사와 보안을 겸업하는 것은 한 쪽에서 정보를 지키고, 다른 쪽에서 정보를 캐내는 일을 동시에 하는 것으로 국내의 영세 기업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7년째 미 C탐정회사의 한국 주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P(44)씨는 “공권력 만이 조사업무를 해온 우리나라에선 개인의 정보를 모두 국가가 독점해온 것이나 다름 없다”면서 “시장의 파이가 커지면 국내 PI는 자본과 경험을 가진 외국 PI의 하청업무를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우리 시장은 폭풍전야”라며 “앞으로 우리 기업은 외국 PI의 고객에서 순식간에 조사대상으로 바뀔 수도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 PI(Private Investigator)=보수를 받고 정보를 수집, 분석해 제공하는 민간인. 우리나라에선 오랫동안 사설탐정이란 명칭이 통용돼 왔지만, 부정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 2005년부터 '민간조사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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